제 3제국의 뿌리 2

오직 무력만이 국가를 형성하고 통합할 수 있다

by 꿈많은 미소년

훨씬 더 나쁜 것은, 이렇게 해서 계급 간의 절망적인 차이를 영속화시키고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비단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 사이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었다.


독일 민족은 다양한 왕조들과 정치적인 파당들의 세력들 사이에서 살아야만 했다. 수 세기 동안 독일의 통합이라는 점에 관한 가능성은 결국 이루어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30년 전쟁과 그로 인한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 독일에는 마지막 대재앙이 찾아왔고, 전쟁이 끼친 여파는 너무 커서 독일은 결코 거기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이것은 유럽이 겪은 마지막 종교전쟁이었다. 30년 전쟁이 끝나기 전에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간의 충돌은 한 편에 카톨릭 측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와 다른 편의 카톨릭 프랑스 부르봉 가와 스웨덴의 프로테스탄트 군주들 간의 훨씬 복잡하고 혼란스런 전쟁으로 커졌다.


이 야만적인 싸움에서 독일 그 자체는 쓰레기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마을과 시골 지역들은 황폐화되고 약탈되었고, 주민들은 대량으로 살해당했다. 문명에 반하는 이 전쟁동안 독일인의 삼 분의 일이 죽음을 당해 사라졌다고 추산된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전쟁 그 자체가 독일에 끼친 영향 만큼이나 독일의 미래에 재앙을 가져왔다. 독일의 대공들은 프랑스와 스웨덴과 한 편에 서서 자신들의 작은 영국들에서 절대적인 지배자로 확인을 받았다.

대략 350명 정도 되는 그 군주들은 황제가 단순히 독일 국내에서 인정되는 만큼 명목상의 최고 군주로만 남아 있는 대신에 실권은 자신들이 가졌던 것이다.



개혁과 계몽의 파도는 15세기 후반에 밀려들어 독일 전역을 쓸어버렸고, 16세기의 초반에는 틈새하나 없이 완전하게 덮어 버렸다. 이 시기에 위대한 자유 도시들은 사실상의 독립을 누렸다.

봉건제도는 이 도시들 안에서 더 이상의 힘이 없이 사라져 버렸고, 예술과 상업은 번창했다. 심지어 시골 지역에서도 독일 농부는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농부들이 누렸던 것보다 더 큰 자유를 확보했다.

실제로 16세기가 시작될 때 독일은 유럽 문명의 원천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이제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고 나서 이러한 분위기는 변했다. 자유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야만적인 수준까지 감소했다. 농노제는 다시 부과되었고, 심지어 이전에 농노제가 알려져 있지 않던 지역들에서조차 농노제가 도입되었다. 도시들은 자신들의 자치를 상실했다.

농부들, 일꾼들, 심지어 중간 계급의 도시민들도 대공들에게 당할 만큼 착취당했다. 이 귀족들은 영민들의 노예 상태로 격하시켜 유지했다. 학업과 예술의 추구는 보류되었다. 탐욕스런 통치자들은 독일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종속된 영민들 사이에서 어떠한 징후라도 나타나면 바로 밟아서 탄압했다.

문명은 독일에서 가만히 정지하게 되었다. 한 역사가가 언급했든이 제국은 "중세 수준의 혼란과 약함으로 인공적으로 안정화되었다."



독일은 이런 역행으로부터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귀족정을 받아들이고 공작으로서 통치하는 소 폭군들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독일인들의 정신 속에 깊이 배어들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생각은 의회에 의해 통치되는 형태로 17세기와 18세기에 영국에서 그렇게나 급속도로 전진했고, 1789년 프랑스에서 폭발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씨앗조차 틔우지 못했던 것이다.

독일인들의 이런 정치적인 퇴행은 너무나 많은 작은 국가들로 분할되고 유럽의 사상과 발전의 흐름이 물결처럼 밀려 드는 것으로부터 고립되어서 독일은 서방의 다른 나라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그 나라들의 뒤에 위치해 있도록 만들었다. 국가의 자연적인 성장은 없었다.


이것은 누군가가 이 민족이 그 다음에 선택한 처참한 길과 그 위에 자리 잡은 비뚤어진 정신 상태를 이해해야만 한다면 마음 속 깊이 담아 두어야만 하는 점이다. 종국에 독일 국가는 무력에 의해서 주조되었고 노골적인 공격성에 의해서 손을 마주 잡고 단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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