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에서 굶주리며 비참하게 살아가던 기록
1909년에서 1913년 까지의 4년 간은 린츠에서 온 이 불굴의 젊은이에게 완전한 비극이자 궁핍의 기간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 눈 깜짝할 동안의 시간은 합스부르크 황실의 몰락과 유럽 중심부에서 오천 이백만 국민을 가진 제국의 수도로서의 종말 직전이었고, 이 시기 비엔나는 세계 전역의 수도들 가운데서도 유쾌함과 매력으로 그 독특함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비엔나의 건축물, 조각상, 음악 등 뿐만 아니라, 그 국민들이 따뜻한 마음을 가졌으며, 쾌할하고, 사랑스러우며, 문명인의 귀감이 되는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다. 비엔나는 분명, 서구가 아는 한 그 어떤 도시도 따라올 수 없는 바로크와 로코코의 공기를 내쉬고 있었다.
비네발트에는 노랗고 녹색인 포도밭들이 단추처럼 드문드문 위치해 있었다. 그 비네발트의 나무로 가득한 언덕 옆의 푸른 다뉴브 강의 아래에 비엔나는 방문객들을 사로잡고 비엔나 시민들에게는 신의 섭리가 자신들에게 특별하게 친절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믿도록 만드는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도시였다. 비엔나 도시의 공기는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엔나가 탄생시킨 토박이 아들들의 재능 덕에 세계에서 우뚝 솟은 최상의 음악을 보유했고, 여기에 유럽이 아는 최고의 음악가들이 있었다. 모차르트, 베토벤과 슈베르트, 그리고 마지막 비엔나의 풍요로운 만년 시기에는 시민들 모두가 친애하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활달하고 잊을 수 없는 왈츠가 온 도시를 메웠다. 시민들에게는 바로크 방식의 삶이 너무나 축복 받은 것이자 인상 깊은 것이어서, 인생 그 자체는 어떤 꿈 같은 것이었다. 도시의 선량한 시민들은 기쁨의 날들을 보내고 밤에는 왈츠를 추고 와인을 마시는 데 시간을 보냈다. 마음에 드는 커피하우스에서 가벼운 이야기를 하고, 음악을 듣고, 극장의 환상극을 보고, 오페라와 오페레타를 감상하며, 마음에 드는 이에게 아부도 하고, 사랑도 하고, 자신들 인생의 대부분을 기쁨과 꿈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이 점은 확실히 해 두겠는데, 제국은 잘 통치되고 있었으며, 군대와 해군은 잘 준비되어 있었고, 제국 내 통신망은 유지되어 있었으며, 사업 거래와 노동 시장 모두 잘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비엔나에서 초과근무를 - 혹은 심지어는 풀타임 근무를 - 그런 것들에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여기엔 지저분한 면이 함께 존재 했다. 이 도시는, 다른 모든 도시들처럼, 어두운 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먹을 것이 마땅치 않고, 입을 옷이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았으며, 가축 우리 같은 집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제국의 수도인 것과 마찬가지로 중앙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산업의 중심지로서 비엔나는 번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번영은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 나가다가 기어를 저속으로 바꾸게 되었다. 많은 저소득층 군중들은 도시를 정치적으로 통제했다. 노동계급은 노동조합을 조직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강력한 정치 단체를 조직했고, 이것이 바로 사회민주당이었다. 소요 사태는 도시의 일상이 되었고, 여기에는 나중에 이백 만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이 참가하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합스부르크 황조의 고대 귀족정을 퇴출시켰고, 교육과 문화는 대중들에게 그 문호를 활짝 열었다. 히틀러가 1909년에 비엔나로 왔던 바로 그 무렵에, 땡전 한 푼 없던 젊은이가 더 높은 고등교육을 받거나 상당히 괜찮은 생활을 할 수 있는 돈을 벌 기회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백만 명의 임금 노동자들 중 하나로서, 수도가 자신의 거주민들에게 드리워주는 문명화의 매력 속에서 살 수 있는 바로 그 기회였다. 히틀러의 유일한 친구였던 쿠비체크가 히틀러 만큼이나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출신이었음에도, 이미 음악학교에서 유명해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젊은 히틀러는 건축학부에 입학하는 것으로 자신의 야망을 두고 그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 "특별한 재능"을 보인 젊은이들이 그러한 자격증명서가 없이도 입학이 허락되었다. - 히틀러에게 여전히 문은 열려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한 히틀러가 더 이상 입학하기 위해 도전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히틀러가 일하는 기술에 흥미를 보였거나 어떤 종류의 정규 직업을 가지려고 했다는 내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히틀러는 빈둥거리면서 기묘한 일들을 꾸물거리면서 일하기를 선호했다. 눈을 치우고, 카페트를 털고, 짐가방을 비엔나 서역의 바깥으로 운반하고, 때때로 건설 노동자로서 며칠동안 일하기도 했다. 1909년 11월에 "숙명을 미연에 방지하기" 를 위해서 비엔나에 도착 한지 일 년이 조금 안 되어서, 히틀러는 시몬 뎅크 카세에 있는 가구가 갖춰진 방에서 강제로 나가야만 했고, 이후 사 년간 값싼 여인숙과 같은 곳에서 살거나, 다뉴브 강 근처의 비엔나 20구의 멜데만슈트라세 27가에서 자선 단체가 운영하는 남성들의 쉼터 한 곳의 거의 재앙 수준의 비참한 막사에서 머물렀다. 그곳에서 자주 도시의 자선 단체가 제공하는 치킨 수프로 배고픔을 달래며 간신히 아사를 모면할 수 있었다.
거의 이십 년이 흐른 후 의심의 여지 없이 이렇게 서술했다.
나에게 있어 비엔나는, 아주 많은 이들에게 순전한 즐거움의 완벽한 전형이자, 즐거움을 찾는 이들에게 축제의 장이지만, 내가 말하기 유감이지만, 내 인생의 가장 슬픈 시기의 단순히 살아가던 기억만 남은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