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도 하지 않고 머리도 감지 않는 젊은 나날
심지어는 요즘에도 이 도시를 떠올릴 때면 다른 것은 없고 그저 그때 고생을 했던, 나쁜 생각만이 든다. 나에게 이 파에아 식의 (티폰과 에키드나의 딸 - 역주) 도시 이름은 5년 간의 고난과 비참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5년 동안 나는 생계를 꾸리지 않으면 안 되었고, 먼저는 하루벌이 노동자로, 그리고는 무명 화가로 일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벌어 봤자 매일 내가 겪는 배고픔을 달래 주기에는 결코 충분하지 않은 적은 돈 밖에 되지 않았다.
항상 그가 이 시기를 말할 때마다 배고픔이 강조되었다.
배고픔은 당시 나의 충실한 수호자였다. 잠시도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먹고 마셔 버렸다. 내 삶은 이 인정사정없는 친구와의 계속되는 투쟁이었다.
하지만 이런 극한적인 상황도 히틀러가 정규 일자리를 찾도로 노력하게 이끌지 못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명확하게 밝힌 것 처럼, 자신이 무산자의 지위로 미끄러질 것이라고 하는 소 부르주아들이 신경쇠약에 걸릴만큼 두려워하는 증상에 빠져 있었다. 그 생각에 따르면 육체 노동자들은 이후에 히틀러가 국가 사회주의 당을 창건하면서 선전하는 데 활용하게 될 개념이었다. 이들은 그때까지도 자신들을 이끌 지도자가 없이 그저 사회에 대한 불만을 내보일 기회만을 찾고 있었고 바로 국가 사회주의 당은 이들을 광범위한 기반으로 하여 창건되었던 것이었다. 급여가 낮고, 무시 받던 화이트 컬러 계층은 최소한 자신들이 "노동자들"보다는 사회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환상 속에 수백 만명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키우고 있었다.
히틀러가 자기 자신은 "무명 화가"로서 삶을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자신의 전기에서 여기에 대해 구체적인 사실을 밝힌 것은 없었다. 다만 1909년과 1910년에 자신이 더 이상 평범한 노동자로 일을 해야만 하는 신분에서는 벗어났다고 언급한 것이 전부였다.
"이 시기에 나는 수채화가이자 무명 제도가로서 독립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 설명은 어느 정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나의 투쟁에서는 이것과는 매우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히틀러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신뢰할 만한 부분이 없는데도, 히틀러의 이 말만큼은 정확하고 확실하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정확히 살펴보면 히틀러는 화가였던 적이 없다. 이 부분은 히틀러의 정적들이 사생활을 캐내어 비방해가며 주장한 내용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히틀러가 그런 직업을 가지고 일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히들러가 완성했거나, 비엔나에 대해 그렸다고 여겨지는 원화들은 대체로 슈테판 대성당, 오페라 하우스, 부르크 극장, 쇤브룬궁전이나 쇤브룬 공원의 로마 시대 유적과 같이 잘 알려진 랜드마크 정도였다. 히틀러의 지인들에 따르면 이런 것은 이미 있던 다른 그림들을 단지 히틀러가 습작 정도의 느낌으로 보고 따라 그린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명백히 히틀러는 자연을 보면서 풍경화를 그릴 실력이 되지도 않았다. 히틀러의 그림을 보면 부자연스럽고 생기가 없어서, 건축가 지망생이 처음 그리는 거칠고 부주의한 스케치들을 딱 떠올리게 만들었다. 종종 그런 그림들 속에 히틀러는 인물을 그여넣곤 했는데, 실력이 너무 떨어져서 마치 미국 만화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연상하게 했다. 당시 히틀러의 원화 스케치의 포트폴리오를 보고는 내가 적어 두었던 메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인물은 거의 없고, 거칠고 조잡하다. 등장 인물 하나는 마치 구울과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하이든에게는 "높고 근엄한 궁전들 밖에서 작고 꽉 찬 푸대들 같이 서 있다."
아마도 이런 조잡한 그림 수백 개는 벽을 장식하는 용도로 소규모 상인들에게 팔았던 것 같다. 또 전시용의 빈 액자 틀을 채울 그림을 찾던 액자 상인들과 그 시기 비엔나에서 유행이 지난 싸구려 의자와 소파의 뒷면에 종종 이 그림들을 붙여 두고자 했던 가구공들에게도 팔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히틀러는 더한 상업적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땀 흘린 뒤 바르는 테디의 습진 치료제와 같은 주부용 물품의 광고를 위한 포스터도 종종 그렸다. 그런 것들 중 하나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돈을 조금 벌게 해준 것으로 밝게 색칠된 양초들을 파는 산타 클로스를 그린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성 슈테판 대성당의 고딕 첨탑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히틀러가 분명히 다른 것을 보고 베낀 것은 아니었고, 이 그림을 통한 광고로 많은 고체 비누를 판매하는 판촉용이었다.
이런 것이 히틀러의 소위 "예술적인" 성취라는 것의 정도였고, 결국 삶의 마지막에 가서는 히틀러가 자기 자신을 "예술가"로 여기게 되었다.
비엔나에서 이런 방랑자의 생활을 하는 세월동안 확실히 히틀러는 보헤미안으로 보였다. 그 시절의 히틀러를 알던 사람들은 나중에 당시의 히틀러의 모습을 기억하기를 긴 검은색의 다 낡아 빠지고 추레한 오버코트를 입었는데, 그 코트는 발목까지 내려와 있었고 이슬람 세계 사람들이 입는 카프탄 처럼 보였다고 한다. 사실 그 코트는 한 헝가리게 유태인 중고옷 거래업자에게서 얻었던 것으로, 이 유태인은 이틀러가 비참한 남성용 공동 숙소 생활을 하면서 친구가 되어서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일년 내내 쓰고 다니던 기름 번들번들한 중절모도 당시의 모습이었다. 기름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은 이후 나이 들어서와 마찬가지로 이마 뒤로 넘겨서 빗었고, 뒷쪽으로는 더럽고 꾀죄죄한 옷깃 위로 단정치 못하게 헝클어진 상태로 되어 있었다. 이는 히틀러가 거의 머리를 자르거나 면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였다. 그 탓에 얼굴의 양 옆과 빰은 턱수염이 다듬어지지 않고 처음 나는 상태 그대로 검고 수북하게 나 있었다. 나중에 화가 비스무레한 것이 되는 하니쉬의 말을 믿을 수 있다면, 히틀러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 유형의 인간"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