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사상적 근원
히틀러가 삶의 이정표로 삼았다는 그 사상들이라는 것은, 한 가지 예외만 제외하면, 히틀러 자신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20세기의 첫 10년 간 오스트리아 정치의 엄청난 혼란 속에서 양산된 거칠고 날 것인 극단적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다뉴브 군주제는 소화불량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수 세기 동안 제국의 인구에서는 소수 집단이 독일-오스트리아계 민족이 수십 개의 민족들이 속해 있는 다인종의 제국을 통치하여 오면서 자신의 문화와 언어를 그 속에 각인시켰다. 그러나 1848년 이래로 비 독일계 민족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소수 민족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소화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인종의 용광로가 아니었다. 1860년에 이탈리아인들이 제국을 부수고 독립해서 나갔고, 1867년에 헝가리 인들은 소위 이중군주제 라는 협정 아래에서 독일인과의 평등을 획득했다. 이제, 이십 세기가 시작하면서, 다양한 슬라브 계 민족들 - 체코 인, 슬로바키아 인, 세르비아 인, 그리고 크로아티아 인들과 다른 민족들 - 이 평등을 요구했고 최소한 민족 자치를 주장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는 이런 민족들의 쓰라린 투쟁에 지배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회 혁명도 또한 발생했고 많은 경우 인종 투쟁으로 전이되었다.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박탈된 하층 계급은 투표권을 요구했고, 노동자들은 노동 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 단지 더 높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 환경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민주주의 정치 권력 또한 원하고 있었다. 사실 총파업이 마침내 모든 남성이 보편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을 가져다 주었고 이것으로 오스트리아의 독일인들의 정치적 지배는 끝을 고하게 되었다. 사실 독일인들은 제국의 절반을 차지하는 오스트리아에서도 숫적으로 3분의 1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정치적 발전 속에서, 린츠 출신의 광신적인 젋은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인 히틀러는 이점에 쓴 맛을 느끼면서 반대하고 있었다. 히틀러에게 제국은 "악취가 나는 늪"으로 가라앉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은 오직 지배자 인종인 독일인이 자신들의 옛부터 가지고 있던 절대 권위를 다시 주장해야만 구원될 수 있는 것이었다. 비 독일 인종들은, 특히 슬라브 인들과 무엇보다도 모든 체코 인들은 열등한 인간들이었다. 철의 손아귀로 그 열등 인간들을 통치하는 것은 다름이 아닌 독일인들까지였다. 의회는 폐지되어야만 했으며 민주적인 "넌센스"는 종말을 맞이해야만 했다.
히틀러는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옛 오스트리아의 세 개의 주요한 정당들의 활동에 열광적으로 참여했다. 사회민주당, 기독사회당, 그리고 범 게르만 민족당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무료 급식소에 헝클어진 채로 늘 와서 끼니를 때우던 단골의 마음 속에서 정치적으로 빈틈 없는 사상이 싹이 나기 시작했다. 이 사상을 바탕으로 히틀러는 놀라울만큼 명확하게 현대의 정치적 움직임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안목이 성숙해지면서, 히틀러가 독일의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가지게 했다.
첫 접촉에서 히틀러는 사회민주당에 대한 격렬한 증오를 키웠다.
"가장 내가 역겨워 했던 것은 게르만주의의 보존을 위한 투쟁에 그놈들이 보인 적대적 태도였다. 또한 슬라브 놈들의 '동지'에 대한 수치스런 구애였다. 몇 달 만에 나는 안 그랬으면 몇 십년이 걸렸을 지도 몰랐던 것을 얻었다. 지독히 성가신 역병을 일으키는 창녀에 대한 이해를 말이다. 그년은 자신을 사회적 덕목이자 형제적인 사랑이라는 이름의 망토를 두르고 숨기고 있었지."
그리고 노동 계층의 이 정당에 대한 자신의 분노의 감정을 이 정당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이유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기 위해서 가시게 할만큼 충분히 지성적이 되었다. 히틀러는 몇 가지를 결론 내렸고, 몇 년 후에 이것들을 기억해 내서 독일 국가 사회주의 당을 창건하는 데 활용했다.
어느 날, 나의 투쟁에서 회상하는 바에 따르면, 히틀러는 비엔나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를 목격했다.
"거의 두 시간 동안 나는 거기 서서 숨을 죽이며 거대한 인간 용이 천천히 그리고 구불구불하게 지나가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초조함으로 마음이 울적해져서 나는 마침내 그 장소를 떠나서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었다."
집에서 히틀러는 사회민주당의 기관지를 읽기 시작했고, 당 지도자들의 연설을 조사하고, 그 조직을 분성하고, 심리학과 정치적 기술을 심사숙고하고 결과를 곰곰히 분석했다. 그러고 나서 사회민주당의 성공을 자신에게 설명해 주는 세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히틀러의 분석에 따르면 사회민주당은 다른 어떤 정당도 하지 못하는 대규모의 시위를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사회민주당은 군중들 사이의 프로파간다의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영적이고 물리적인 공포"라고 부른 것을 사용하는 것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이 세 가지 교훈은, 비록 분명히 오류투성이의 관찰과 자신의 엄청난 편견을 기반으로 조합된 것이긴 했지만, 젋은 히틀러에게 강한 흥미를 불러 일으킨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