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민주당에서 배우다
10년 안에 히틀러는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서 이 점을 잘 활용했다.
나는 이런 시위가 특히 부르주아 계층에게 가하는 악명 높은 영적인 공포를 잘 이해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러한 공격과 같지 않았다. 어떤 측면에서 거짓과 중상모략의 진정한 대량 사격을, 상대방이 가장 위험하게 보이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거기에 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공격을 받은 상대방의 신경이 무너질 때까지 사격은 계속되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취약점에 대한 정확한 계산에 기반한 전술이며, 그 결과는 거의 모든 수학적 확실성을 바탕으로 승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나는 개인과 군중을 향한 육체적인 공포의 중요성도 동일하게 이해하는 데 성공했다. 지지자들의 무리 속에서 승리를 획득하는 것은 자신들의 대의가 정당하고 그것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반면에, 패배한 상대방은 대부분의 경우에 더 이상의 어떠한 저항도 소용없을 것이라 절망하게 된다.
나치 전술에서 이것 이상 더 정확한 분석은 없었다. 히틀러가 자신의 글에서 쓴 대로, 결국 이 전술을 개발하여 활용했다.
비엔나에서 독립하여 날아갈 준비가 된 히틀러를 강하게 매료시키는 정당이 두 개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곳에 모두 히틀러는 자신의 재빠른 상황 판단과 냉정한 분석을 적용했다. 히틀러의 말에 따르면 먼저 히틀러가 충성을 한 곳은 게오르그 리터 폰 쇠네러에 의해 설립된 범 게르만주의 당이었다. 쇠네러는 히틀러의 가족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 오스트리아의 슈파탈 근처 지역 출신이었다. 그 시기 범 게르만주의자들은 이 다인종 제국에서 독인인의 수위권을 위해 필사적인 투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쇠네러는 "심오한 사상가"이며 폭력적 국가주의, 반 유태주의, 반 사회주의, 독일과의 연합 및 합스부르크 왕조와 교황청에 대한 반대 등을 담은 초보적인 사상을 포용한 것으로 히틀러는 생각했고, 해당 정당에 대해 빠르게 평가를 내기고 그 원인을 분석했다.
"이 운동이 사회 문제의 중요성에 대해 부적절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진정으로 호전적인 군중에 맞선 다는 대가를 치른다. 의회에서 의석을 가지게 되면 더 이상 강력한 추동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고, 이 조직에 모든 특유의 약점을 짊어지우게 된다. 가톨릭 교회를 반대하는 투쟁은 국가가 자신의 고유성을 교회에서 찾는 오스트리아에서 최상의 요소들 가운데 수많은 것들을 빼앗아 가는 결말을 초래한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쥐었을 때 이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게 될 것이었지만, 자신이 나의 투쟁에서 길게 강조한 비엔나 시절의 교훈들 중에서 한 가지는 정당이 교회에 반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점이었다.
"비판의 여지가 아무리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교리와 논쟁에 관한 것은 배제되어야 한다."
히틀러는 쇠네러의 로스-폰-홈 (로마로부터 떠나기) 운동은 전술적 오류라고 설명하면서 말했다.
"정당은 결코 한 순간도 모든 이전의 역사적 경험에서 순전한 정치적 단체는 결코 종교적 개혁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한 적이 결코 없다는 사실을 시야에서 놓쳐서는 안된다."
하지만 범 게르만주의 당이 군중들을 분발하도록 불러 일으키는 데 실패한 것은 이 점만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고, 히틀러는 바로 이 점을 범 게르만주의 운동이 실패하는 가장 큰 실수로 규정했다. 히틀러가 21살이 되어서 얼마 안 지났을 때, 이것이 그에게 치명적 오류로서 다가온 것은 범 게르만주의 당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히틀러 스스로의 마음 속에 생각이 자리매김했다는 것이 분명했다. 히틀러가 자신의 정치 운동을 설립했을 때 이러한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히틀러가 자신은 하지 않은 범 게르만주의 당의 실수는 또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것은 최소한 국가의 강력한 기존 제도나 기관들 중 일부의 지지를 얻는 것에 실패한 것이다. - 만약 교회와 제휴하지 못했다면, 육군이라든가, 다른 걸 말하자면, 내각이나, 수상 등 기존 권력층 누군가를 후원자로 가지는 것이다. 정치적 운동이 그러한 후원을 얻지 못했다면, 이 21살 짜리 젊은이가 보기에, 그 개인이나 단체가 권력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어려울 것이었다. 이러한 후원은 정확하게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1933년 1월의 그 가장 긴요했던 날들에 준비할 약삭빠른 영민함을 가졌다는 것에서, 그리고 히틀러와 국가 사회주의 당이 한 위대한 국가의 권력을 차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증명된다.
히틀러의 시대에 이 점을 잘 이해했던 정치 지도자가 비엔나에 한 명 있었다. 마찬가지로 군중에 기반을 둔 정당을 만드는 것의 필수 불가결함도 또한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 인물은 칼 뤼거 박사로, 비엔나의 시장이자 기독사회당의 당수로서, 비록 두 사람이 결코 만난 적은 없지만 그 누구보다 히틀러의 정치적 멘토가 된 인물이었다. 히틀러는 항상 박사를 "모든 시대를 걸쳐 가장 위대한 독일인 시장... 그 시기의 소위 "외교관"이라는 모든 작자보다 더 위대한 정치가.. 만약 칼 뤼거 박사가 독일에서 살았더라면 우리 민족의 위대한 스승들 중에서 순위가 매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