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위대한 정치적 멘토
확실한 것은, 비엔나 하류 계급의 이 크고, 화통하고, 다정하며, 상냥한 우상과 나중에 히틀러가 정치가로서 가진 면모와는 거의 닮은 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불만으로 가득차 있던 소 부르주아 계급에서 지지를 끌어낸 정당의 지도자로서 뤼거 박사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가가 되었고, 나중에 히틀러가 그랬듯이, 소 부르주아들이 오스트리아의 수도를 정치적으로 요란하고 거친 반 유태주의의 장으로 만든 속에서 지지를 얻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뤼거 박사는, 가장 수수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자신의 길을 대학 속에서 걸어온 인물로, 사려 깊은 지적 성취를 이루었다. 그리고 유태인을 포함한 박사의 반대자들은 박사가 진정으로 품위 있고, 기사도적이며, 관대하고 관용심이 깊은 인물이라는 것을 손쉽게 인정하고 있었다. 탁월한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히는, 이 시기 비엔나에서 성장했는데, 뤼거 박사가 결코 자신의 공식적인 반 유태주의 사상으로 하여금 유태인들에 대해 우호적이고 도움을 주려는 자세를 그만두도록 허용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츠바이히가 회상하기를,
"뤼거 박사의 시 행정부는 완벽하게 공정하고 심지어 전형적으로 민주적이었다. 이 반 유태주의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해서 떨고 있던 유태인들은 항상 그래왔던 것처엄 동일한 권리와 자존감을 가지고 계속 살아갔다."
이 점은 젊은 히틀러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히틀러가 보기에, 뤼거 박사는 너무 지나치게 관용적이었고, 유태인들로 말미암은 인종적인 문제들을 인지하지 않고 있었다. 히틀러는 뤼거 박사가 범 게르만주의 를 포용하려다 실패한 것에 분개했고, 로마 가톨릭의 성직권 주의를 존중하는 것과 합스부르크 황조에 대해 충성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저 늙은 프란츠-요제프 황제는 뤼거가 비엔나 시장으로 선출된 것에 대해 두 번씩이나 재가를 거부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결국에 히틀러는 이 남자의 천재성을 인식하도록 되어졌다. 그는 군중의 지지를 어떻게 획득하는 지를 알았고, 현대의 사회 문제들과 프로파간다의 중요성, 그리고 군중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장악하는 것에서의 웅변의 중요성 등을 이해했다. 히틀러는 뤼거가 강력한 교회를 다루는 방법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정책은 무한한 영민함으로 적합하게 딱 맞다."
그리고 마침내, 뤼거는 "오랫동안 존속해 왔던 기관과 제도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모든 이용 가능한 수단을 기민하게 활용했다. 이것으로 그는 여러 오래된 권력의 원천들로부터 자신의 정책 수행과 방향을 위해 가능한 최대한 이점을 끌어낼 수 있었다."
아주 분명하게 간단명료하게 말해서, 여기에 히틀러가 이후 자신의 정당을 건설하는데 사용할 것인, 그리고 그 정당을 이끌어 독일에서 권력을 얻을 때 이용할 사상과 기술들이 담겨 있었다. 히틀러의 독창성이라고 한다면, 일차 대전 이후의 독일을 상황 속에 이것들을 적용할 유일한 합법적 정치가가 되어야 한다는 데 있었다. 다른 민족주의와 보수 정당들 사이에서 나치 운동 만이 이후의 거대한 군중의 지지를 얻고, 권력을 쟁취해야만 했다. 육군, 공화국 대통령, 그리고 대기업 조합들의 지지를 받아서 최종 권력은 자신만이 가지는 것이 되어야 했다. 육군, 대통령, 자본가 - 권력의 세 "오래 존속해온 제도", 이들은 히틀러를 독일 재상으로 이끌어줄 것이었다. 비엔나에서 배운 교훈들은 진정으로 유용한 것으로 증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