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헌 국회가 선출되고 바이마르 헌법이 제정되다
베를린에서의 그 싸움이 끝이 나자마자 국회의원 선거가 독일 전역에서 실시되었다. 이번 국회 선거는 새 헌법을 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1919년 1월 19일에 실시된 그 투표에서 중간 계급과 상층 계급들은 그 "혁명"이라는 것이 있었던 이래로 두 달 조금 더 지나서 다시 자신감을 회복한 것 처럼 보였다.
사회민주당 (국회 다수당 세력과 거기에 속하지 않는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은 아무도 그 짐을 나누어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홀로 국가 통치의 부담을 안고 있었는데, 30,000,000 유권자 중 13,800,000 표를 얻었고, 국회에서 421석 중 185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것은 다수당이 되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것이었다.
명백하게 새로운 독일은 노동자 계층 단독으로 건설해 나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두 개의 중간 계급 정당들, 즉 중앙당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고, 민주당은 구 개혁당과 국가 자유당 좌익이 12월에 합당해서 창설되었는데, 선거에서 11,500,000 표를 얻었고 국회에서 166석을 차지했던 것이다. 두 정당 모두 온건하고 민주적인 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공언했다. 비록 궁극적으로는 군주제의 회복에 대해 상당한 공감이 있기는 했지만 기본 입장은 공화국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보수주의자들은 그 지도자들 중 일부가 11월에 잠적해 버렸고, 폰 베스타르프 백작과 같은 나머지 지도자들은 에베르트에게 보호를 호소했다. 비록 선거 결과 의석의 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영향력이 사라질 수 있는 수준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독일 국가 인민당으로 다시 명명되어져서 삼 백만 표 이상을 획득했고 선출된 44명을 의회로 보낼 수 있었다. 국가 인민당의 우익 동맹자들로 국가 자유당은 자신들의 당명을 독일 국민당으로 바꾸었고, 거의 백 오십 만 표를 얻어서 19석을 확보했다. 결정적으로 소수 정당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이 두 보수주의 정당들은 국회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에는 충분한 의석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1919년 2월 6일이 될 때가지는 바이마르에서 의회가 열리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에 이 두 정당의 지도자들은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이름과 황제와 그의 장군들이 전쟁을 수행했던 방식을 변호하기 위해 일어섰다.
인민당의 당수인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나중에 생각과 마음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처럼 보였던 것들을 아직은 경험하지 않았다. 1919년에 슈트레제만은 여전히 라이히스탁에서 최고 사령부의 대변자로서 알려져 있었다. - "루덴도르프의 젊은이" 라고 불렸다. - 합병 정책의 폭력적인 지지자, 무제한 잠수함 전쟁의 광신도 였던 것이다.
여섯 달 동안의 토론이 있은 후에 국회에서 헌법이 드디어 만들어졌다. - 1919년 7월 31일에 라이히스탁에서 통과되었고, 8월 31일에 대통령에 의해서 비준되었다 - 이 헌법은 문서상으로는 이십 세기에 본 그런 종류의 것들 가운데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헌장이라 할 수 있었다. 기술적으로 거의 완벽했으며, 기발하고 재간이 넘치면서 그저 감탄만 나올 만큼 훌륭한 장치들이 거의 결함이 없는 민주주의가 작동하도록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각 책임제에 의해 구성되는 정부 형태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가져온 아이디어였고,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강력한 대통령은 미합중국에서, 국민 투표 제도는 스위스에서 참조한 것이었다.
인구 비례에 의한 대표 선출과 투표자 명부에 의한 투표 등의 정교하고 복잡한 체계는 사표의 방지와 소수자 집단이 의회에서 대표될 권리를 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바이마르 헌법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자신의 정신 세계에 귀를 통해 들어 오는 그 소리가 달콤하고 호소력이 있는 것이었다.
바로 이 헌법에서 이른바 국민 주권이 선언되었다.
"정치적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유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