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하느냐 마느냐 그것의 결정이 이렇게도 어렵다.
독일이 전쟁을 시작한 책임을 지고 연합국들에게 카이저 빌헬름 2세와 대략 팔 백명 정도의 다른 "전쟁범죄자들"을 내어야만 한다고 조약이 요구하게 된다면 독일인들이 덜 격노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배상금은 나중에 정해질 것이었지만, 오십억 달러를 금 마르크로 그 최초 지불로 1919년과 1921년 사이에 지불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현물의 형태 - 석탄, 배, 목재, 가축 등 - 도 현금 배상으로 계상되어졌다.
하지만 가장 상처를 받았던 부분은 베르사유가 사실상 독일을 무장해제시켰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어쨌든 시간이 흐른 후에도 독일이 유럽에서 헤게모니를 가지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이 미움 받던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이 러시아에 부과했던 것과는 다르게, 독일을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전혀 다치게 하지 않은 채 온전하게 남겨 두었고, 독일의 정치적 통합과 위대한 국가로서의 잠재적인 힘 또한 보존한 상태로 두었다는 것이다.
에르츠베르거는 예외적으로 평화조약의 조항들은 쉽게 회피 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면서 조약의 수용을 촉구했었지만, 바이마르의 임시정부는 베르사유의 강권이라고 이제 불려지고 있는 그 조약을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했다. 정부의 뒤에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압도적인 다수의 시민들이 의견을 함께하며 있었다.
그렇다면 육군은? 만약 조약이 거부되어진다면, 육군은 서부에서의 피할 수 없는 연합국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었을까? 에베르트는 최고사령부를 설득했다. 그 최고사령부는 포메라니아의 콜버그로 본부를 막 이전했던 참이었다. 6월 17일에 폰 힌덴부츠크 육군 원수는 독일 육군의 저항은 무의미하고 헛된 것이라고 본 그뢰너 장군에게 재촉을 받아서 대답했다.
적대행위가 재개될 경우 우리는 [폴란드의] 포젠 주를 되찾고 동부에서의 전선을 방어할 수 있다. 그러나 서부에서는 적군의 심대한 공세를 견딜 수 있다고는 거의 확신할 수 없다. 협상국의 수적인 우위와 전선의 양쪽 날개에서 선수를 쳐서 우리를 측면 공격하고 포위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면 더욱 그렇다.
전체적으로 작전의 성공이라는 점은 거기다가 매우 의심스러우며, 다만 한 명의 군인으로서 나는 치욕스러운 평화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명예롭게 죽는 것이 더 낫다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드린다.
모두에게 숭배 받는 이 최고사령관의 결정적인 말은 최고의 독일 전통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 말의 진실성은 독일 국민들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으로 평가되어질 지도 모른다. 독일 국민이 모르고 있던 사실이란 것은 힌덴부르크가 그뢰너의 의견이 이미 동의했다는 것으로, 연합국에게 저항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제 희망이라고는 없는 무의미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육군의 소중한 장교들이 모두 스러져가는 결과를 낳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 육군 뿐만 아니라 독일 자체가 소멸하는 결과가 될 것이었다.
연합국은 이제 독일에게 분명한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6월 16일, 힌덴부르크가 에베르트에게 답변을 적어 보내기 하루 전날에, 연합국은 독일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조약이 6월 24일까지 받아들여지거나 아니면 휴전 협정은 종료되고 연합국은 "자신들의 조항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조치"를 취할 것이었다.
다시 한번 에베르트는 그뢰너에게 호소했다. 만약에 연합국들에 대해서 군사적인 저항이 성공할 수 있다는 가장 작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고 최고 사령부가 생각한다면, 에베르트는 국회에서 조약을 거절하겠는 선언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 답변은 즉시 해야만 했다. 최후통첩의 마지막 날인 6월 24일이 드디어 찾아왔다. 내각은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오후 4시 30분에 국무회의가 소집되었다.
다시 한번 힌덴부르크와 그뢰너는 상의했다.
"내가 알고 있다시피 당신도 무장 저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이 들고 몹시 지쳐 보이는 육군 원수가 말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1918년 11월 9일 폰 힌덴부르크 원수가 카이저에게 나아가 최종적인 진실을 얘기할 수 없었을 때, 이 불유쾌한 의무를 그뢰너에게 떠넘겼고, 반면에 공화국의 임시 대통령에게는 알려 주지 않았다.
" 자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에게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네."
힌덴부르크는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고, 다시 용기 있는 장군은 원래 육군 원수가 하기로 되어 있던 최종적인 책임을 떠안았다. 비록 장교단에게 자신이 희상양이 되리라는 것은 충분함을 넘어서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에 틀림이 없었지만 말이다. 곧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서 최고 사령부의 견해를 전달했다.
육군의 지도자들이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에서 해방되어 - 이 사실은 독일에서 곧 잊혀졌다. - 국회는 다수결에 의해 평화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승인했고, 이 결의는 연합국의 최후통첩의 시한이 다 가기 단 19분 전에 클레망소에게 통지되었다.
나흘 후인 1919년 6월 28일에 평화조약은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서명이 완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