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정신 세계 1

히틀러 작가로서 대박이 나다

by 꿈많은 미소년

히틀러는 자신의 책을 "거짓, 멍청함 그리고 비겁함에 맞선 사년 반 동안의 투쟁"이라고 부르기를 원했지만, 나치 출판사의 완고한 매니저였던 막스 아만은 이 책의 출판을 담당할 예정이었는데, 그렇게나 너무 느릿느릿하고 - 그리고 팔리지 않을 것 같은 - 제목에 반발하고 과감하게 나의 투쟁 (마인 캄프)으로 줄여버렸다.


아만은 책의 내용에 관해서는 심하게 실망했다. 아만의 입장에서는 먼저 히틀러가 비엔나에서의 이름 없는 "노동자"에서 전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는 과정을 회상하는 개인적 일대기가 담긴 이야기를 희망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익히 보아왔듯이 이 책 속에는 히틀러의 자서전과 같은 성격의 내용이 거의 담겨 있지 않다.


이 나치 사업가는 또한 비어홀 폭동의 안 쪽 이야기를 중시했다. 즉 사건의 전개를 다룬 이야기 서사와 각 세력들 간의 거래 등의 요소가 있는 일종의 드라마 같은 내용인데, 아만은 이렇게 하면 분명히 사람들이 읽기 좋아해서 잘 팔릴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이 점에서 히틀러는 지나치리만큼 영악해서 당의 재정 상태가 가장 어려울 때에도, 마지막 남은 석탄 가루 하나까지 긁어내었던 것이다. 마인 캄프, 즉 나의 투쟁 속에는 이 실패한 폭동에 관해서는 거의 한 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나의 투쟁의 초판은 1925년의 가을에 출판되었다. 약 사백 페이지의 작품으로 십 이 마르크의 가격이 매겨졌다. (3달러였다.) 이 당시 독일에서 출판되는 대부분의 책 가격 보다 거의 두 배였다.

어떤 수단으로도 즉시 베스트 셀러가 될 수는 없었다. 아만은 첫 해에 23,000 권이 팔렸고 판매가 계속 늘어나서 매상이 호조를 보인다고 의기양양했다. - 반 나치 모임들에서는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장이었다.


1945년에 나치 출판사인 에헤르 페르라그의 인세 장부를 연합국이 손에 넣은 덕분에 마인 캄프의 실제 판매에 관한 사실이 이제 공개되어질 수 있었다. 1925년에 이 책은 9,473 부가 팔렸고 그 이후 삼 년 동안 연간 판매고는 감소했다. 1926년에 6,913 부에서 1927년에 5,607 부 그리고 1928년에는 단지 3,015 부가 팔리는 데 그쳤다. 1929년에는 약간 증가해서 7,664 권이 팔렸고 나치 당의 재정이 호전됨과 아울러 매상도 상승했다. 이는 1929년 까지는 두 권짜리로 출간되었지만, 1930년에는 저렴한 한 권짜리 판본이 8마르크의 가격으로 나오자, 54,086부가 팔리게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50,808부로 살짝 떨어졌다가 1932년에는 90,351 권으로 그 판매고가 치솟았다.



히틀러의 인세는 - 1925년 이래로 자신의 가장 큰 수입원이었다. - 초기 일곱 해 동안 평균적으로 보면 괜찮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금액은 이후 1933년에 히틀러가 받은 것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1933년은 히틀러가 국가 재상이 된 해였다. 바로 이 해는 히틀러의 마인 캄프가 이 해의 베스트셀러가 된 첫 해가 되어 백만 부를 팔아치웠고, 히틀러가 얻는 인세 수입은 1933년 1월 이후부터 10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증가하였는데, 무려 백만 마르크를 넘어서게 되었다. (대략 $300,000 이다)


이렇게 대박이 나면서 히틀러는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작가가 되었고 처음으로 백만 장자가 되었다. 성경을 제외한다면 나치 정권의 기간동안 이 만큼 많이 팔린 다른 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의 가정에서 테이블 위에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얹어 두지 않고서 안전하다고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결혼식 장면에서 신랑과 신부에게 나의 투쟁 한 부를 선물하는 것은 거의 의무적이었다. - 그리고 확실히 정치적이었다. - 그리고 거의 모든 학교의 아이들은 초등이든 중등이든 어떤 종류의 학교이든지 막론하고 졸업식을 거행할 때 나의 투쟁 한 권을 선물받았다.


1940년, 즉 제 2차 대전이 일어난 다음 해에는 이 나치 성경은 독일에서 육백만 부가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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