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과 달리 내일 배움 카드라는 혜택으로 취업교육이 거의 무상으로 진행되던 시절이었으니 2017년의 시간은 새로운 배움의 기쁨이 넘쳤다.
거의 10여 년을 초등학교 돌봄 전담사로 적성에 딱 맞아서 즐거운 생활을 누리고 그즈음 무기 계약으로 전환되는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나의 역마살은 다른데 시선을 두고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당시 근무했던 학교는 북한의 대남 방송이 들리는 파주 끝자락의 위치였고 나는 다른 길로 간다며 친한 후배를 꼬드겨서 후임자로 추천했고 잘 세팅되어서 방향을 틀었다.
방향 전환이라고 하기에는 뭣한데 그 당시 6개월 정도 실업급여를 받으며 내일 배움 카드로 취업 훈련 프로그램을 거의 1년에 걸쳐서 참여하였다. 제과 제빵 과정과 초콜릿을 만드는 쇼콜라티에까지 3가지 과정을 놀며 놀며 배웠다. 매일 빵 냄새에 취하고 입에서 즐기며 행복한 시간이었다. 교육비가 그 당시 거의 300만 원에 달했고 지각 결석을 한 번도 안 하면 취업훈련 장려비로 교통비등 지원이 되어서 그때에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세금을 많이 축낸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 당시에 50대였고 강사도 20대 , 동기들도 거의 30대에서 40대의 연령 구성비로 가족같이 지내며 매일 빵파티에 수업 후 술파티까지 즐겼다. 나는 종일 수업을 듣는 학생으로 오전에는 20대들과 제과과정을 배우고 저녁에는 직장인들과 야간 제빵과정을 배우고 함께 어울리는 시간을 보냈다.
수업은 팀별로 이루어졌고 나의 똥손은 그저 성실함으로 버티며 학원의 최신 시설과 강사의 배려 그리고 동료들의 협업으로 매일 빵이 와르르 생산되었고 너무 맛있어하는 나를 다들 신기해하며 수업 후 나누어서 가져가는 빵을 나에게 많이 몰빵 해서 난 동네 지인들에게 늘 후한 인심을 나누었다.
그렇게 거의 1년 과정을 마치고 자격증은 필기만 통과하고 실기는 엄두도 못 내고 수료증 3장을 거머쥐고 젊은 동기들은 유명 베이커리로 취업해 나가는데 난 사실 학교에서 돌봄 교실 특기교육으로 요리수업을 제안받기도 하였는데 나의 바람은 방향성이 있었다. 자폐증 친구들과 제빵 수업을 하는 커리큘럼으로 인생 2막 취업 전선을 꿈꾸었으니 50 중반의 나에게 기회는 오지 않았고 면접을 가면 교감선생님들이 난색을 표하며 자기랑 동갑인 강사를 부담스럽다고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제빵을 하며 너무 행복했던 나였기에 특수 아동과 교감을 나누려는 꿈은 그저 꿈이 되었다.
그즈음 빵에 푹 빠져서 오븐부터 제빵도구를 들이면서 거의 베이커리 카페 수준으로 쟁였던 시절이었고 친한 동기들과 새벽배송 빵 사업을 구상하며 괜스레 몰려다닌 추억이 남았으니 되었다.
우습지만 안성맞춤 알바도 체험했으니 프랜차이즈 브런치 카페의 빵을 새벽 6시부터 9시까지 20여 가지를 세팅해서 두고 퇴근하는 꿀알바 자리를 누렸다. 그야말로 엄청난 시설의 힘으로 기본 반죽된 생지를 본사에서 배송받고 최고급 발효기에서 설정해 두고 멋진 외제 오븐기에서 굽고 소소한 꾸밈을 하는 알바였는데 나는 그때 새벽출근이었는데 너무 즐겁고 또 행복했다. 아무도 없는 카페에 새콤을 해제한 뒤 불을 켜고 배달된 재료를 정리하고 매장 한가운데의 진열대를 무에서 유로 가득 채운뒤 마시는 커피 한잔의 행복은 나만 아는 묘미의 시간이었다. 알바를 시작할 때 내가 커피를 좋아해서 퇴근 전 커피 한잔을 먹어도 된다는 말에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스친다. 브런치 카페는 10시부터 오픈이라 내가 새벽 작업으로 빵을 세팅하면 딸 같은 알바 학생이 출근하고 난 한쪽에서 커피를 셀프로 내려서 우아하게 마시고 자진 퇴근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그 당시 프랜차이즈로 운영되던 브런치 카페는 영업이 잘 되는 편이었으나 가맹점의 납부비를 부담스러워하던 사장님은 가맹을 탈퇴 후 칼국수 집으로 업종을 변경하였다.
빵은 추억도 남기고 뱃살도 남기고 행복은 크게 남기고 나에게는 그렇다.
이후 어느 날 나의 빵 인연은 또 한 가지 관련된 알바를 얻게 되는데 바로 베이커리 키즈 카페의 붐을 타고 또 한가닥 추억을 움켜쥐게 된다. 언젠가 또 한판 이야기를 남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