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육아 수기
요즘 시간이 여유 있다 보니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글창고 속 글을 손질하며 구역별 정리를 하는 재미가 생겼다.
때는 첫딸을 낳고 육아에 집중하면서 운영하던 놀이방 ㅡ지금의 어린이집ㅡ을 정리하고 시댁 부근으로 이사 가서 새로운 직업을 모색하기도 하던 1995년 즈음이었다. 직업도 없고 육아에 집중하면서 갈증이 스멀거릴 때 보게 된 육아 잡지의 공모소식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육아 잡지 속 중 '베스트 베이비'라는 잡지가 창간되며 출산육아에 대한 수기를 모집한다는 소식 속에 심사위원이 당시 '원미동 사람들'이라는 소설로 유명해진 양귀자 작가라는 사실에 나는 무조건 도전하였다. 결선에 오르면 어찌 되었든 양귀자 작가가 나의 글을 읽으리라는 생각만으로 기분이 들떴고 기대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당선작 목록에 내 이름을 넣었고 잡지의 창간호에 나의 출산 수기와 가족사진등을 싣게 되었다. 당시 상금도 받았고 그건 잡지사에 내 사생활을 팔아넘긴 것이었다. 나의 좌우명인 "최선의 선택과 선택에 대한 최선"이라는 제목으로 응모했던 큰딸 잉태부터 출산까지의 수기였다.
순간의 당선 기쁨과 기록을 남긴 것에 만족하고 잊었는데 한참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시댁 조카가 연락이 왔고 우리 가족사진과 출산 수기를 강남의 어느 산부인과 병원에 비치된 홍보책자에서 보았다는 것이었다. 역시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니 그리 흘러가는 것이리라! 아마도 어느 산부인과 대기실의 홍보책장 어딘가에서 나의 자랑스러운 임신과 출산 과정이 임신을 희망하고 출산을 두려워하는 예비 산모와 엄마들의 좌표가 되리라는 것으로 정리했다.
그때 잡지사 글을 잘 스크랩해서 큰딸 앨범에 보관해 두고 글은 나의 에피소드 모음집 글 창고에 쟁여두었다. 시간이 많아지는 3월에는 일단 글창고 대청소를 시작해야겠다. 구역을 좀 더 나누고 먼지도 털고 하나씩 꺼내어서 보듬어 주는 시간을 준비해야겠다. 역시 봄날은 대청소를 하기에 딱 좋은 시기일 테니!
[ 최선의 선택과 선택에 대한 최선 ]
따사로운 봄볕이 비치는 거실 한쪽에서 난장판을 만들며 제멋대로 노는 상#이를 바라보면서 난 어느새 짜증 섞인 목소리가 되어버린다.
“상#아 잠 좀 자라 엄마 우아하게 커피 한잔 마시자."
무언가 엄마의 목소리가 호의적이지 못한 것을 알아채곤 덩달아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이제 막 10개월로 접어든 상#이!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다. 어찌 저 아이를 두고 내가 짜증을 낼 수가 있단 말인가? 인생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면서까지 아이를 가지려고 안달을 하더니만 이젠 그 소중한 아이와 하루를 티격태격하며 보내다니! 어쩜 내 자신이 소양이 부족한 엄마라서 그런가 보다 여겨졌다.
임신 중에 병원진료를 가면 ‘이번이 첫 임신이세요?라는 질문을 받곤 했다. 나이 32살에 임신을 한 것도 그렇지만 결혼 5년 만에 낳게 되는 아이고 보니 그런 질문이 나올 만도 하다. 신혼 초에는 내 인생에서 자식을 거느린다는 것을 실감도 못했지만 그냥 우리들만의 인생설계로도 충분하다는 기고만장함이 있었다. 직업이 아이들과 지내는 유치원 생활이기에 유독 내 아이를 갖고 싶다는 절절함보다는 그냥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되었고 언젠가는 내 자신이 운영해 보려는 꿈이 있었다. 그 당시는 햇살 좋은 날 신호등 앞에서 커다란 배를 불쑥 내밀고 무료하게 서있는 임산부를 보고는 어유 그냥 집에 있지 저 배로 어딜 다니냐 하며 인상을 쓰기도 하였다. 결혼 후에도 거의 아줌마 티조차 없이 1년 동안 다니던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변함없는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90년 겨울, 결혼 1년 만에 자그마한 ‘놀이방’을 개원하여 나름대로 40이 넘은 후에도 멋지게 사회 활동을 하는 중후한 여인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2년여 동안 스스로 운영하면서 많은 엄마들과 직접 부딪치다 보니 내 인생에 아이를 두어야 무언가 성숙한 인생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더구나 동창들은 결혼을 일찍 한 경우에는 학부형이 된다는 소리까지 듣고 보니 점점 전체적인 내 모습이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남편의 직장문제로 떨어져 지내는 시간까지 생기고 보니 아이를 갖는 일이 점점 더 멀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드디어 92년 겨울, 첫 아이를 결혼 3년 만에 갖게 되었다 평상시에 달리 건강 관리를 하지 않고도 항상 아이들과 부대끼며 지냈고 워낙 식성도 좋고 활동량이 많기에 건강에 있어서는 자신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임신이라는 긴장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놀이방 임대 기간이 끝나고 좀 더 넓은 곳으로 옮기리라는 계획 속에 이사까지 겹쳤으니 새로 이전할 건물의 단장까지 신경 쓰느라 몸은 더욱 엉망이었다. 마음 같지 않게 몸이 안 따라주니 짜증이 엄청 늘었고, 그런 가운데 이사를 마쳤다.
허나 문제는 생기고 말았다. 이사 후에 집들이까지 강행한 무식하고 세심하지 못한 철부지 엄마 때문에 뱃속의 아기는 겨우 9주 만에 ‘계류 유산’이 되고 말았다. 사실 학부모님들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었고 원아 관리문제로 혹시나 원아가 감소될까 걱정이었고 수술도 소리소문 없이 치러야 했다.
내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은 바로 첫아이의 유산 이후가 아닌가 싶다. 우선은 인생에서 내 아이가 들어설 자리에 대해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사회생활을 하든 건강이 밑천일 텐데 중절수술 이후에는 건강에 정말로 자신이 없었다. 놀이방 생활은 거의 온종일을 아이들과 보내야 하는데 저녁에 아이들이 가고 나면 몸이 녹초가 되어버렸다. 무엇보다도 임신이란 것이 남편과 나만의 문제였던 것이 이젠 집안 어른들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친정엄마는 여자 나이 30에 첫애를 유산했으니 앞으로 아이를 낳을 일이 걱정이라며 심란해하셨다. 아무리 형제 많은 집안의 막내아들이지만 연로하신 시어머님도 내색 없이 걱정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불안해지고 있었다. 수술 후 6개월 이후에나 임신을 하여야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몸을 추스르면서도 왠지 허송세월하는 듯 안절부절못했으니 뒤늦게 불똥이 떨어진 셈이었다. 그때가 나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회의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결혼 초의 당당함을 스스로 비웃기도 했고 뜻대로 되는 일보다는 뜻하지 않은 일을 맞이하며 살아가야 할 때가 더 많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가슴에 절절하게 와닿았다. 아이 없이 멋진 인생을 설계하리라는 원대함은 이젠 덧없는 허풍이 되고 말았다. 배부른 여자나 아이 업고 가는 여자만 보아도 가슴이 찡할 정도로 마음이 약해져 지냈던 기억이 난다.
급기야는 유명하다는 한의원도 기웃거려야 했다. 그곳은 정말 진실한 삶의 현장이었다. 많은 여자들이 아이를 낳기 위해 그리고 아들을 낳기 위해 긴 시간을 마음 졸이며 자신의 인생을 걷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그동안의 무심함과 방자함에 우울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수술 후에 몸조리가 안된 탓인지 한쪽 나팔관이 막혀있어 임신을 더욱 어렵게 한다는 한의사의 말을 들으며 우울해하던 날, 양쪽 나팔관이 폐쇄되어 임신이 어렵다는 20대 초반이던 새댁의 눈물을 보게 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하였다. 난 30이 넘은 노산이 아닌가? 그것도 유산의 경험까지 있으니...... 한의원에 가는 날이면 난 최대한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려고 상대방이 귀찮아하는 눈치에도 아랑곳없이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며 많은 경험을 얻으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들 낳는 법에 대한 나름대로의 비법을 이야기하였지만 난 무엇보다 임신여부에 관심이 있었지 아들과 딸의 구별은 와닿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사랑을 나누는 잠자리가 아닌 무언가 생산라인을 갖춘 공장처럼 치밀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잠자리를 가지면서 남편과 나는 아이 낳는 일의 어려움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때는 배란일을 맞추는 일이 큰 일과였고 다음 달 생리가 늦기라도 하면 괜스레 메슥거리고 입맛도 없는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가 생리가 나오는 날은 공든 탑이 무너지는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세월 속에 놀이방 아이들과 부대끼고 남편과 부대끼며 정서적인 상태가 온화했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이들한테도 미안하고 남편과도 괜스레 복닥이는 유치한 시간이기도 하였다.
1993년 11월 18일은 우리의 ‘4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 우리의 의지대로 임신을 안 하던 시절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결혼 4년이 지나도록 부부만인 가정의 아픔을, 순조롭게 임신하여 아이를 낳은 사람은 모르리라! 그즈음 둘째 동서와 아주버님이 설악산 여행을 제의하였고 우린 신혼여행도 설악산으로 갔던 터라 의미 있는 결혼기념일 여행이 되리라는 기대감에 들떴다. 더구나 여행일정 속에 배란일이 있었으니 왠지 기쁜 일이 생길 것 같은 마음에 더욱 들떴다.
아뿔싸! 막상 속초에 도착하니 아주버님과 알고 지내시던 두 쌍의 부부가 함께 여행 동반자로 와있지 않은가? 분명 숙소는 방 2개로 예약을 해둔 사실이 떠올랐다. 당연히 우리 부부와 형님부부가 방 하나씩을 사용하리라는 계산이 빗나가고 방 하나는 여자들이 그리고 또 하나는 남자들이 사용하리라는 생각에 힘이 쭉 빠졌다. 마치 여행의 목적이 남편과의 잠자리인양 석연치 않은 기분인 나 자신이 참으로 우습고 어리석게 느껴지면서도 쉽사리 그런 기분을 떨구어 낼 수 없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 맞추다가 우리 둘이 빠져나와 속초 시내로 가자’고 엉뚱한 투정을 남편에게 하며 왠지 큰 횡재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느꼈지만 그런대로 여행의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어쨌든 우리의 역사는 그즈음 이루어졌다.
어렵게 얻은 임신의 기쁨도 잠시, 나에게 유난히 버거운 임신 10개월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철저한 계획 임신이었기에 생리예정일이 1주일이 지난 후에 임신진단 시약으로 확인을 하고 다니던 한의원에 다시 진맥 하려 갔다가 가슴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한의사는 임신초기에 진맥으로 아들, 딸을 구별한다는 명의이고 보니 난 새삼스레 내가 임신이라는 소리도 없이 진맥을 받았다. 다른 때와 다름없이 의사는 약 처방을 내려주며 약 받아가라고 했고 난 멍청하게도 태아에게 좋은 약이 거니 했다. 그만큼 절실한 가운데 한의사에게 목매는 심정이었다. 그때 옆에 계시던 친정엄마가 “임신인데 약을 먹어도 되나요?”하시면서 의아해하자 의사는 화를 벌컥 내며 “임신은 무슨 임신이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신이 아찔해지며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임신이라서 확인받으러 왔어요”라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의사만 바라보았다.
“아직 임신할 때가 아니야 한쪽 나팔관이 완전히 치료된 것도 아닌데 마음대로 임신을 하면 어떡해?”하며 의사는 호통이었다. 다시 소변검사로 임신 양성반응을 확인한 후에도 의사는 2,3일 내에 생리가 나올 거라면서 이런 불안한 임신은 임신해도 착상이 안되어 하혈하는 경우가 많으니 임신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기가 막혔다. 그러면서 그동안 굳게 믿으며 다녔던 의사의 말이 사실이라는 생각에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기가 막힌 표정으로 앉아있는 엄마와 나를 보면서 의사는 세수도 하지 말고 꼼짝 않고 2주만 버티다가 출혈이 없으면 그때 다시 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다음 환자를 불렀다. 일어서는 우리에게 ‘만일 임신이 사실이라면 아들일 텐데’하는 흐릿한 말을 던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2주의 몸조심덕인지 유산의 위험은 피했고 우리의 아이는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사실이다. 가파른 한의원의 계단을 내려오며, 그리고 집에까지 오면서 엄마와 나는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하였다. 그러나 어이가 없었다. 억울함에 이 친구 저 친구한테 하소연을 하다 보니 “얘 임신이면 산부인과에 가야지 왜 한의원에 갔니?”라는 한 친구의 말이 바로 해결책이 되었다.
다음날 종합병원에서 산부인과 진료를 받았고 유산의 위험이 있으니 입원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의사는 기가 막힌 듯 임신은 확실하고 지금의 시기는 유산의 위험을 따질 시기도 안된다며 2주 후에 진료받으러 오라고 대답했다. 한마디로 난 임신부였고 다음 진료일까지 조심하면 된다는 결론을 얻고 보니 무조건 조심하자는 비장함에 꼭 이번만을 유산시키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가슴이 벅찼다.
과감하게 2주 동안 친정에서 몸조리하며 승부수를 던지기로 하고 놀이방일을 수습하여 2주 동안 연수차 놀이방을 비우는 걸로 각본을 짰다. 그 와중에도 2주의 공백이 걱정되어 저녁 시간에는 학부모들과 따로 전화까지 하며 아이들 일을 확인하며 정말 연수로 바쁜 척했으니 선의의(?) 거짓말을 용서받을 수 있을까?
아무리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2주를 머리를 안 감고 세수도 고양이 세수로 버티고 나서 초음파 진료를 받고 나니 정말 임신을 실감할 수 있었다. 죄송스럽게도 그 와중에 어머님 생신과 집안 행사를 챙기질 못하는 부실한 며느리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내 임신은 요란스럽고 유별난 임신이 되고 있었다.
7월의 예정일이 무더위라는 사실조차 염두에 둘 겨를 없이 오직 임신기간을 안전하게 보내야 한다고 나 자신도 그렇고 주위에서도 노래를 부르다시피 하게 되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건강을 염려했고 안부인사로 늘 몸 괜찮으냐고 묻는 게 일상이 되었건만 난 1주 정도의 입덧기간을 빼고는 전천후 식욕을 과시하며 2시간마다 무언가를 먹어야만 하는 버릇이 생겼다. 평상시 예민하고 걱정 많은 타입의 내 성격은 완전히 바뀌어 무사태평으로 변하여 아무리 고민이 있어도 그저 잘되겠지 하는 생각부터 하였다. 그러니 주변의 걱정에 괜스레 민망하기도 했다.
배가 서서히 부르면서 학부모님들한테도 이해가 되도록 양해를 구하면서 그런대로 놀이방 운영도 잘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자제하는 어려움과 활동량이 많은 내 속성을 꺾고 행동의 제약을 받는 가운데 불러오는 배는 남편과 나의 기쁨이었다. 자꾸만 뻐기지 말고 겸손해야 지하는 다짐이 무색하게 남편에게 괜스레 큰소리도 치는 팔자 좋은 아내가 되었다. 하나 인생은 주기성을 띠면서 나를 훈련시키려는 것인지 또 다른 어려움이 임신 8개월째인 5월에 찾아왔다.
그날따라 낮잠 잘 여유도 없었던 차에 하필 아이들 간식이며 밑반찬을 만들다 보니 오후 내내 몸이 고되게 느껴졌다. 아이들을 귀가시키고 쉬고 있자니 배가 이상스레 뭉치면서 살살 아픈 것이 마치 생리 전의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좀 나은듯해서 남편 저녁을 준비하자니 또 그렇고 다시 반복되고... 가만히 시간을 보자니 덜컥 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오후에도 내내 1시간에 10분 정도 힘들어서 쉬어가며 일했던 기억이 스친 것이다. 엄마한테 울먹이며 전화하니 “얘 팔삭둥이가 더 똑똑하단다 걱정 말고 박서방한테 연락해서 병원 가라, 엄마도 곧 갈 테니” 하시는 말씀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정신없이 남편에게 연락을 하고 나니 마음이 정리가 되는듯했다. 우선은 남편이 저녁을 안 먹었으니 저녁상을 차려놓고 다음날 아이들 식사준비와 간식준비를 하고는 선생님한테 연락을 해서 다음날 놀이방 일정을 부탁드렸다. 남편은 놀라서 들어섰건만 난 기어코 남편을 저녁까지 먹게 하고는 병원으로 향했으니 그때가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출산예정일까지는 그저 잘 먹고 몸조심하자는 생각에 출산의 두려움까지 느껴볼 겨를이 없었던 나에게 분만실에서 3일간 입원했던 사실은 커다란 경험이었다.
생생하게 출산의 과정을 지켜보며 처음에는 겁에 질려서 눈물만 나왔다. 밤새 끊이지 않는 만삭이 된 여인들의 출입과 침대를 덜컹거리며 몸을 비트는 산고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쳤다. 여자는 죄가 많아서 출산의 고통을 겪는다더니 정말 실감 나는 말이었다. 이런저런 검사를 받으며 앞으로 내게 닥칠 일들을 헤아리자니 착잡한 심정이 되어 복잡해졌다.
그런 중에도 하나둘씩 마음이 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 어차피 받을 고통이라면 의연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자! 더구나 고통뒤에는 내가 그리도 바라던 우리 아기가 옆에 있어줄 테니......’
이런 결심이 선 이유는 시간의 흐름 앞에 인간은 무력하면서도 그 안에서 무언가를 얻어 쥔다는 생생한 진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남편이름과 괴성을 지르며 헉헉거리던 여자들이 긴 시간의 고통 속에 분만실로 들어서면 신기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침상에 실려온 산모들은 긴 잠을 자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표정으로 회복실로 건너가는 일이 입원 3일 동안 여러 번 반복되었다.
입원 3일 만에 ‘조산’의 위험은 사라져서 퇴원을 하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그때부터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예정일에 맞추려고 안간힘을 썼으니 몇십 년 만에 찾아온 지독한 무더위와의 싸움은 오히려 별 문제도 아니었다. 더위 때문에 낮잠도 부실하고 밤은 밤대로 불면의 밤을 맞이하는 가운데 7월 중순이 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의 임신기간은 위기를 안고 있을 줄이야! ‘이슬’이라는 것이 비친 상태에서 자궁문이 조금 열려 있어서 ‘유도분만’이라는 것을 해야 된다는 의사의 지시대로 입원을 했으나 하루 만에 낳을 줄 알았던 아이를 입원 3일 만에야 촉진제를 2번이나 맞고 낳게 되었다.
“아니, 지난번 입원한 후에 몸조리를 얼마나 잘했으면 낳을 때가 되어도 아이가 나올 생각을 안 해요?”라는 간호사의 농담 속에 또 분만실의 아우성을 온몸으로 느낀 시간이었다. 바로 옆 침대의 24살 난 산모는 똑같이 촉진제를 맞고 쉽사리 아이를 낳아 건너편 회복실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늙은 산모의 설움을 한번 더 느꼈다. 결전의 1994년 7월 20일 새벽 12시가 지나면서 담당의사는 자궁문을 열리게 하는 약을 투여하고 한번 더 촉진제를 놓아주었다.
“오늘은 꼭 낳을 테니 걱정 말아요 만일에 오늘도 자연분만이 안되면 제왕절개 수술을 해서라도 오늘은 낳아야 해요”라는 의사의 말 중에 ‘오늘’과 ‘제왕절개’라는 단어만 내 귀에 맴돌았다.
'바로 오늘이 결전의 날임에는 틀림이 없구나. 하지만 이 고생 끝에 수술로 아이를 낳아야 하다니......’ 마음속으로 어차피 한 번은 괴성을 지르는 고통이 찾아온다면 빨리 배가 무진장 아파서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안경까지 침대 위에 벗어놓고 그동안 책에서 읽어둔 호흡법을 떠올리며 만반의 준비를 하는 나를 보고는 “ 오늘은 정말 낳을 요량인가 봐요, 안경까지 벗고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네”하며 담당의사가 웃음 띤 얼굴로 지나쳤다.
그다음의 일은 정말로 내가 그리도 바라던(?) 고통의 시간뿐이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나는 아랫도리에서 뜨끈한 양수가 터지는 것을 느끼고 간호사를 불렀고 담당의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분만실로!”하는 소리를 듣고는 ‘아! 이젠 됐다’ 싶은 마음으로 일순간 긴장이 풀어졌다. 왜냐하면 많은 산모들이 거의 초죽음속에서 분만실로 옮겨지면 잠시 후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던 기억에 이젠 나도 일단락되는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허나 웬일인가? 숨을 몰아서 10까지 세어야 아기가 무사히 자궁을 빠져나온다는 간호사의 지시대로 열심히 힘을 주었건만 수세기는 일곱 정도에서 내 호흡을 끊어놓는 바람에 혹시 아이가 잘못되지 않을까 그 와중에도 겁이 났다. 배 위에 올라타는 간호사가 오히려 고마울정도로 빨리 아이 울음소리가 듣고 싶었다. 한참 후에 분명 아이가 나왔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음에도 난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못 들어서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하며 울먹였다. 그러자 한 간호사가 “아니 왜 울어요? 딸이라서 그래요?”하기에 왜 아이가 울지 않느냐고 기운 없이 묻자, 한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내 옆에 와서는 아이 엉덩이를 톡톡 때리며 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의 심정은 정말, 부웅 뜬 느낌이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의사는 마무리 봉합처치를 하느라 아픔이 여전했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내가 조금만 더 기운을 낼 수 있다면, 팔을 뻗어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고 싶다는 마음으로 편한 기분이 되었다.
내 시간을 많이 뺏기는 육아의 부담 속에서 상#이를 마냥 사랑스럽게만 바라볼 수 없을 때 난 다짐한다. 분만실에서 바라보던 눈길로 상#이를 대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도 많이 한다. 하나 인간은 간사스럽고 한결같은 마음으로만 살아갈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반문도 떨쳐낼 수 없다.
‘최선의 선택과 선택에 대한 최선!’이라는 나의 좌우명을 상#이와 부대끼는 일상 속에서 다시 새겨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