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형 화가를 추모하며

by 리단쓰

오전 커피타임을 하면서 남편이 젊은 날 스치듯 만났던 어느 화가를 언급하면서 애도하는 마음을 전했다. 지난 2월 27일에 세상을 떠난 황재형 화가를 추모해 본다. 열정적으로 살아낸 70대의 선배 세대들이 사라지는 걸 느끼는 후배 세대의 60대가 안게 되는 애환이었다.

여러 기사등을 살펴보며 나는 문득 한강 작가의 소설 '검은 사슴'이 떠오른다고 하니 작년에 내가 한창 한강 작가 전작 읽기를 할 때 옆에서 언급한 화가가 바로 황재형 작가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대화중 '검은 사슴' 소설 속 탄광촌의 묘사에서 80년대 이후 민중 미술의 리얼리즘으로 작품활동을 하는 황재형 화가가 떠오른다고 했던 대화들이 퍼즐처럼 끼워졌다.


1952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그는 1982년 중앙 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0년대 초 강원도 태백에 정착해 일하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직접 들어가 노동 현장과 삶의 터전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산업화의 그늘에 놓인 노동자와 서민의 삶을 주요 화두로 삼아 작품 활동을 하였고 특히 1982년 태백에서 실제 광부로 일한 경험은 그의 작업 세계를 결정지은 전환점이었다. 당시 노동운동이 확산되는 시기였고 구로동이나 가리봉동의 노동자들이 산업화의 몸살에 밀리고 밀려서 가는 곳이 바로 태백 등의 탄광촌이었다. 그래서 생겨난 표현이 밀리다 밀린 막다른 길이라는 의미로 그곳은 막장이라고 불린 것이었다. 그는 그 시절 탄광 노동의 고단함과 위험, 광산촌 공동체의 애환을 몸으로 겪은 뒤 이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광부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2017년 가나아트에서 열린 개인전에 이어서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회천'에서는 탄광촌 노동자 작업복 연작부터 머리카락 초상화까지 40여 년의 작업을 조망하는 65점을 선보이며 한국 리얼리즘 미술의 미술사적 가치를 재조명했다. 그리고

2016년 제1회 박수근미술상을 수상했다니 현실적인 참여도 게을리하지 않은 화가였다.


그의 생전 인터뷰 중 가슴에 박히는 대목이 있어서 옮겨보게 된다.

"1980년대 운동권 궤멸은 인내력 부족, 이론과 실천을 통합 못 시킨 탓이라 봅니다. 강원도 사북과 정선에 첫 발을 디뎠을 때 나는 구경꾼일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광부들은 나의 예술보다 땀을 원했거든요. 당시 내 붓질이 광부의 삽질과 과연 같은가 고민했었습니다. 마당패를 만들고 벽화 운동, 시민 판화 운동을 벌이며 미술 캠프를 시작한 것도 그들과 나를 붙들어 매겠다는 선언이었죠. 시대에 절망했으나 소생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과 함께 있겠다는 뜻을 그림으로 토해 냈습니다."

그의 시간은 작품과 생활이 같은 궤도 위에서 굴러가기 시작했고 비로소 구경꾼이 아닌 노동자, 광부 화가로 거듭나며 소리 없는 정진을 한 모습에 숙연해졌다.


80년대 당시 황지 탄광 매몰 사고를 목격하며 남기게 된 작품은 치열한 삶의 흔적으로 낡은 작업복만 남긴 채 사라진 광부를 애석해하는 심정이 절절하게 표현되었다. 바로 탄광 속 광부를 표식 하는 '황지 330'이라는 작품은 이름 없는 노동자로 끝내 생을 마치는 처절함으로 엄청 아리게 한다.


오늘 황재형 화가의 부고를 떠올리며 한강작가의 예술적 지향과 맞물리는 회고를 하게 되는 것은 왠지 동류로 흐르는 줄기를 보게 되어서 아닐까? 탄광이라는 동일한 공간과 어둠 속의 공간을 바라본다는 시각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한강 작가는 서사로서 소설을 탄생시키고 황재형 화가는 이미지로 그림을 남겨주었기에 그림자 속 인간의 삶을 성찰하는 예술가의 혼을 놓칠 수가 없었다.


한강작가는 인간 존재의 어둠을 탐구했다면 황재형 화가는 검은 탄광 속에서 역사와 노동의 어둠을 놓치지 않고 남겨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인터뷰 기사의 한 줄을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남긴다.


"행복한 삶만 삶이 아니다. 불행 속에도 안정이 있다."


자신의 신념을 묻은 태백의 땅에 이제 죽은 뒤에도 묻히는 황재형 화가를 기억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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