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전작 읽기 -2월] 바람이 분다, 가라

바람이 분다, 가라

by 리단쓰

이번 한강작가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를 읽어나가며 모눈종이가 떠올랐다.

그 위에 등장인물의 좌표를 찍으며 책 읽은 후의 여운을 살펴본다.

독서는 독서량이 중요하다기보다는 독서 후 느낌의 질량이 삶의 자양분이든 좌표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믿는 1인이기에 좋은 질량의 느낌을 얻는 건 행복하다.

주인공은 서인주와 이정희로 중심축이 잡히는 포맷인데 독서하는 중에도 독서 후에도 뭉근하게 뻐근한 잔상을 남겨주는 등장인물은 인주 삼촌인 이동주라는 인물이었다.

본의 아니게 주변인들에게 삶의 형태를 규정짓는데 영향을 주며 그들의 삶이 방향의 물꼬를 만들 때 개입 인자가 되는 인물이기 때문일까?

책 읽는 내내 버거운 느낌은 뼛 속까지 문과인 나의 기질에 자꾸 던져지는 자연의 원칙 같은 공식 부호 등의 묘사를 만나야 되는 일이었다.

한강 작가는 30대 후반에 현대 과학 이론인 천체 물리학의 몰입으로 방대한 독서를 하며 건져놓은 원리들을 소설에 녹여가며 주제의식을 관통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다른 책들이 주는 난해함과 다른 곤란함을 주는 이론들은 그저 밤하늘의 둥근달을 보듯 반짝이는 별을 올려다보듯 잘 받아들이며 읽어냈다.

읽어 가며 그리고 읽어낸 후 덜거덕 거리며 남겨지는 잔재들의 단어가 남겨졌다.

<달의 뒷면>이라는 단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신선한 느낌이었다.

달의 표면도 신비로운데 달의 뒷면의 생경스러움은 놀랍다.

그 뒤안길을 굽이 살피는 게 가능할까?

오래전 지인 중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진 온화한 미소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상 무거운 침묵의 장례식은 아직 젊은 그녀의 죽음을 명확하게 규정짓지 못하는 어중간한 생각 속에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밝은 웃음과 따스한 눈빛 뒤에 그 뒤에 달의 뒷면처럼 무언가 있었을까?

난 이번 소설을 읽으며 그녀가 자꾸 떠올라서 눈물이 찔끔 배어 나오는 시간을 겪었다.

<호흡 충돌>이라는 해석을 보면서 삶과 죽음의 교차점에서 적당한 거리감과 균형과 간극을 헤아리며 우리가 맞다고 생각하는 방법론의 최상은 과연 옳은 것일까? 고민해보기도 하였다.

<파란 돌>이라는 단어는 중요한 가치인 것 같았다.

진흙탕 물속에서 그것을 지워 내려 버둥거리는 손짓은 오히려 더 혼탁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그냥 마음의 형체에 힘을 빼고 응시하면 진흙탕은 가라앉고 맑은 물의 정체를 만나는 느낌이 들었다.

'파란 돌'이 주는 단어의 의미를 살피다가 알게 된 사실은 역시 한강 작가의 이어지는 사색의 자리에 있어서 시집과 단편 소설 속에서 만들어진 단어라는 것이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시집에 있는 '파란 돌'이라는 시를 떠올리게 되면서 감흥이 남았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로 시작되는 시의 내용은 충분히 <바람이 분다 , 가라 > 소설 속에 녹아 있음에 놀랐고 소설 역시 '파란 돌 '이라는 제목의 단편 속에서 정희와 인주 삼촌의 서사는 충분히 설명되었다.

한강 작가의 다른 소설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심장이 쫄깃거리는 긴장과 깨달음의 복선을 알게 해 준 소설이었다.

마음속에 남기고픈 구절들을 정리해 본다.


모든 것이 수축되는 한 점에서, 시간과 공간, 물질과 비물질이 하나가 된 그 점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헤어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죽은 적도 태어난 적도 없었던 것이다.

닥쳐,라고 나는 이를 물고 중얼거린다.

산소호흡기 속에서 쒜엑쒜엑 숨을 몰아쉬던 인주의 부은 얼굴 위로, 이 모든 말들은 궤변에 불과하다. p67


별들은 보석이 아니고, 천사들의 눈이 아니고, 소금도 설탕도, 큰 곰도 국자도 아니라는 것을, 매 순간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불덩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상하게도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어.

보석이 아니라서 천사들의 눈이 아니라서, 활 쏘는 사람도, 전갈도, 쌍둥이도 아니라서 별들은 아름다웠어.

타오르는 불덩이라서 아름다웠어. p175


거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일 초의 십 분의 일, 아니, 더 작은 조각까지 만져진다.

초조한가.

초조하지 않다.

잃을 게 있는가.

없다. p180


11ㅡ12 화 4ㅡ5

돈암 2 150 H 텔레콤 7ㅡ11 5 p191


민서는 아직도 상황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엄마 몸에서 불이 꺼졌어?

민서는 물었습니다.

다신 안 켜져? p199


사실이었습니다.

어떤 죄도, 혐의도 나에게는 없었습니다.

오직 악몽만이 내 무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p305


무한히 번진 먹 같은 어둠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삼촌은 말했지.

생명이란 가냘픈 틈으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한테서 생명이 꺼지면 틈이 닫히고.

흔적 없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생명이 우리한테 있었던 게 예외적인 일.

드문 기적이었던 거지.

그 기적에 나는 때로 칼집을 낸 거지.

그때마다 피가 고였지. 흘러내렸지.

하지만 알 것 같아.

내가 어리석어서가 아니었다는 걸.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걸.

...... 지금 내가, 그 얼음 덮인 산을 피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p385 386


나는 숨을 토한다.

쒜엑쒜엑. 거친 숨이 허파를 찢으며 울린다.

두 눈을 흡뜬다. 고개를 비튼다. 빗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울부짖는 사이렌이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가 부풀어 오른 팔로 물속에서 파란 돌을 건져 올린다.

누군가가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 p386 387


살아간다는 것은 그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살아내야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잠시 묵상을 해보며 인주 삼촌인 이동주라는 인물이 깊은 수면 속에서 파란 돌을 움켜쥐며 활짝 웃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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