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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로라 Sep 01. 2023

폴란드 병아리 감별사 또는 북한공작원?

폴란드 서부 도시인 포츠난(Poznan)에 전시회가 있어 참관한 적이 있습니다. 가는 날부터 쉽지 않았는데 제가 타려는 비행기의 기장이 규정 내 휴식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고 기내 조종석에서 강제 휴식을 하느라 비행기가 약 1시간 늦게 출발했습니다. 기장은 많은 승객의 목숨과 안전을 책임지기 때문에 한번 운행을 한 후 일정시간을 쉬어야 하는 규정이 있는데 이 휴식 시간을 1시간 남기고 운항을 하려 한 겁니다. 이 때문에 조종석에서 강제로 1시간을 쉬어야 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진 거더군요.  결국 출발은 했지만 다시 코펜하겐에서 환승을 해야 했는데 제가 늦게 도착해서 환승 비행기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비행기에 들어가자마자 승무원은 출입문을 급하게 닫았으며 "너 때문에 비행기가 늦게 출발하잖아? "라고 원망하는듯한 승객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느끼며 제 자리에 앉아 겨우 포츠난으로 출발했습니다.


포츠난에 도착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래처와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여느 유럽 도시가 그렇듯, 포츠난에도 광장이 있었고 여러 식당들이 손님을 호객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 식당에서 폴란드 전통 요리를 먹었는데 저는 폴란드 전통 수프인 쥬렉을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쥬렉은 발효 곡물 수프로서 약간 신맛이 나는 크림수프인데 삶은 계란과 폴란드 소시지(키에우바사)를 잘라 넣습니다.  지역에 따라서 레시피가 판이한데 저의 경우 사워도우빵을 파내서 만든 그릇에 먹었습니다. 중간쯤 먹으면 빵그릇 윗부분을 뜯어 남은 수프에 찍어 먹었는데 이것만 먹어도 한 끼 식사가 될 정도로 양이 풍부했습니다.  사진은 제가 찍은게 아니고 예시입니다.






다음날 전시회를 둘러본 후 거래처와 저녁식사를 마치고 거래처 호텔바에서 간단히 맥주로 2차를 하고 있었는데 건너편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이 자리를 잡고 한잔하기 시작하더군요.  시간이 좀 지나자 그중 남자 한 명이 제 테이블로 오더니 한국분이냐고 물으며 시간이 되면 한국인들끼리 한잔 하자고 제안하더군요. 저는 이국땅에서 한국인을 만난 게 반가워 거래처와 2차를 마친 후 한국분들 테이블에 합석했습니다.  그분들에게 폴란드에 계신 이유를 물었더니 병아리 감별사로 오셨다 하더군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병아리는 암/수 구분을 해서 수놈은 사료용으로 폐기 처분하는데 이러한 암수 구별을 하는 분이 병아리 감별사이고 특히 한국인 감별사들의 능력이 출중해 해외에도 진출하여 활동들 하고 계십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2명의 남자 얼굴이 좀 편안하지 않고 손도 험해 보이는 반면, 여자분은 상당히 미인이어서 좀 부조화를 느꼈는데 불현듯 북한 공작원이 아닌가 싶더군요. 여자분이 평범한 얼굴이었으면 의심을 안 했을 텐데 부조화스럽게 미인이라 의심이 들었습니다.  


간혹 해외에서 미인을 만나 술 한잔 하다 깨어보니 북한이더라... 이런 사례가 생각나 슬슬 불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자신들이 살 테니 자리를 옮겨 가라오케로 가자 하더군요. 호텔 바 만 하더라도 오픈된 공간이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하지만 폐쇄된 가라오케 공간에 갇히면 꼼짝 못 하고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신이 바짝 나더군요. 그래서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켜 곧바로 택시를 잡아 제 숙소로 도망치듯 돌아왔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분들이 정말로 병아리 감별사인지 북한 공작원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 적성 국가였고 아직도 공산주의 분위기가 잔존하는 폴란드 지방 도시에서, 인상이 험한 남자 2명과 미녀라는 부조화, 그리고 저에 대한 지나친 호의를 생각하면 그 당시 가라오케까지 따라갔다면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니거나 제가 특별히 매력적이지 않다면 세상 살면서 이와 같은 호의를 받을 일은 없습니다. 상식 이상의 호의를, 그것도 낯선 이국땅에서 제안받는다면 일단 자리를 벗어나는 게 안전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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