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처럼 보이는 결론에 대해
두달 간 집중했던 프로젝트가 있었다.
팀 내 논의를 반복했고, 유관부서와 조율했고, 흐름을 깔끔하게 정리해 한번에 플로우를 보이게 했다.
데이터와 사용자 니즈도 무리 없이 끌어왔다.
'어디에 내놔도 무리 없다' 싶은 감각이 들 때까지 다듬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위 결정권자의 한마디가 떨어졌다.
"다른 방향은 어때요?"
구체적인 피드백은 없었다.
단정 짓는 어조도, 회의적인 기류도 아닌 그저 조용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 한마디로 디자인은 아카이브 폴더로 들어갔다.
더 이상 열리지 않을, 정리된 느낌으로 봉인되는 공간.
처음에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처음 겪는 일도 아니다.
그러니까 금세 체념하게 된다.
'뭐, 그럴 수 있지' 하는 마음이 자동으로 작동한다.
이런 건 그저 "보류"라고 부른다.
보류라는 말이 참 절묘하다.
틀렸다는 말도 아니고, 다시 쓰라는 말도 아니다.
지금은 아닌 것 같다는 뜻.
그러니까 다시 꺼낼 일도 거의 없다.
보류는 회사 버전의 안녕이다.
그리고 오늘, 2시간 30분짜리 팀 전체 회의가 있었다.
회의 안건은 많았고,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할 말이 있는 얼굴로 회의실에 들어섰다.
누구는 수치와 로직으로, 누구는 유저의 감정과 케이스로, 누구는 전략적 포지셔닝이라는 단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내 진지한 분위기였고, 그만큼 회의가 길어졌다.
두 시간을 넘기자 집중력이 흐려졌고, 마지막 30분은 말보다 정적이 길었다.
회의는 결국 이렇게 마무리됐다.
“결론은 지금 내릴 수 없지만, 3트랙으로 제공하는 방향으로 한번 가보죠. 일단 그렇게 열어두는 걸로.”
‘일단’, ‘한번’, ‘열어두는 걸로’
모호한 단어들이 모여 만들어낸 희미한 결론 같은 결론.
사실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결정.
회의실을 나올 때, 누군가는 피곤하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그래도 방향은 잡힌 거죠?"라고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의는 끝났고, 내 일정엔 또 새로운 정리와 리서치, 초안 정리와 커뮤니케이션이 추가됐다.
이 일이 익숙하지 않은 건 아니다.
무의미한 수고라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언가 남는 것도 아니다.
기록은 있지만 감흥은 없고, 성과는 있지만 성취는 없다.
가끔은 내가 일을 하는 건지 일이 그냥 흘러가는데 내가 그 안에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될 때가 있다.
팀원들 슬랙에는 각자 오늘 회의에 대한 회고가 올라오고, 나는 아카이브 폴더에 오늘 보류된 디자인 파일들을 하나씩 옮긴다.
그 폴더는 이름만큼 차분하고 무해한 공간이지만, 왠지 그 속에는 나의 시간도 함께 저장된 기분이다.
사람들이 말한다.
회사 일은 원래 그런 거라고.
정해지는 건 없고, 되었다가도 뒤집히고,열심히 해도 보류되기 십상이라고.
그 말이 맞는다.
그래서인지 더 씁쓸하지도 않다.
그저 오늘도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을 나왔을 뿐이다.
그리고 조용히 폴더를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