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내 안에서 아우성치는 녀석이 하나 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소화불량이다.
"이 대리가 이번에 한 달 동안 멕시코에 출장온대. 내 업무 도와주러 온 거라 내가 계속 챙겨줘야 할 것 같아."
"응, 알았어."
출장자가 오고 나서부터 남편은 늦게 귀가했다.
"아니, 왜 이렇게 늦게 와?"
"말했잖아... 출장자 와서 계속 챙겨야 한다고."
"그게 이렇게 늦게 온다는 뜻이었어?"
"미리 말했으니 괜찮을 줄 알았지."
그제야 이해했다. '챙긴다.'는 말 안에는 저녁도, 주말도, 그의 시간을 내준다는 뜻이 들어 있었다.
섭섭함이 밀려오고 심장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우리 부부는 연애 때도, 결혼 후에도 싸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주재원 생활은 신혼의 즐거움을 멈춰 버렸다.
남편은 회사 일에 책임을 다해야 하는 상황을 이해해 주길 바랐고,
나는 그가 가정을 우선으로 여기길 바랐다.
결코,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처한 입장만 다를 뿐.
띠링띠링띵-
그에게 전화가 왔다.
"미안해, 곧 사장님이 오셔서 보고서 만드느라 집에 12시쯤 들어갈 것 같아."
나는 그 길로 차에 시동을 걸어 동네 친구와 카페로 나갔다.
난 요거트, 그녀는 디카페인 라떼를 시켜서 같이 나눠마셨다.
카페 안을 가득 채운 커피 향은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달콤 쌉싸름했다.
한 모금, 두 모금.
웬일인지 위산이 역류하지 않았다.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이 위로가 되는 사람들이 있듯, 커피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서른 이후, 그 마저도 내 몸은 거부했다.
커피는 내 몸을 거스르는 작은 반항이 되었다.
그리고 잠 못 이루는 밤.
디카페인조차 소화하지 못한 나는 새벽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으윽ㅡ
배가 너무 아팠다.
한 달이 되도록 상체가 뜨겁고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었다.
그간 겪었던 소화불량과 차원이 달랐다. 약도 듣지 않았고 먹기만 하면 속이 부글부글하고 뱃속은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요동쳤다.
동네 의원에서 약을 지어도 전혀 차도가 없었고 무슨 큰 병이 걸린 건 아닌가 싶어서 네이버와 구글, GPT에 매일 같이 검색했다.
진료 한 번에 7만 원 혹은 10만 원을 지불하며 종합병원에 의사를 만나 다른 약을 처방받고 나서야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미 나는 3개월간 6kg가 빠져있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었고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오직 호박, 오이, 당근, 흰밥, 간장, 계란찜, 고기찜이었다.
이 마저도 또 소화불량 때문에 겁이 나서 극소량만 먹었으니 볼살은 다 빠져서 얼굴이 홀쭉해졌고 상체도 살이 빠지면서 근육도 같이 빠졌다. 옷이 헐렁헐렁했다. 거울 속 나는 앙상했다.
장이 시끄러우니 생각도 시끄러웠다.
적응이 어려운 해외생활과 매일 같은 혼밥, 혼자 TV를 보고, 생각을 이어 붙이던 날들.
생각의 소용돌이는 나를 몹시도 괴롭혔고 우울함의 먹구름은 나를 온종일 덮었다.
그리고 이어진 출장자의 재방문
또 이어진 늦은 귀가,
이 대리와 함께하는 주말.
그날 대화 끝에 그는 말했다.
"만약에 애기 생기면 한국으로 가서 사는 게 어때?"
"나 혼자 가서 살란 말이야?"
"응, 여보가 여기서 사는 거 힘들어하잖아.
거긴 병원도 더 잘 되어있고..."
그의 말을 자르고,
난 여태 그에게 보여준 적 없던 분노의 얼굴을 비추고,
들려준 적 없었던 고함소리를 내질렀다.
"나 그냥 한국 갈게! 지금 당장 갈게!!"
그동안 눌러온 감정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먹은 게 없어 힘도 없던 나는
축 늘어진 몸으로 엉엉 울며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그에게 여실 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테이블에 올려둔 책이 우수수 떨어지며 거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