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
그의 말을 자르고,
난 여태 그에게 보여준 적 없던 분노의 얼굴을 비추고,
들려준 적 없었던 고함소리를 내질렀다.
"나 그냥 한국 갈게! 지금 당장 갈게!!"
그동안 눌러온 감정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먹은 게 없어 힘도 없던 나는
축 늘어진 몸으로 엉엉 울며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그에게 여실 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테이블에 올려둔 책이 우수수 떨어지며 거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엎어지고 흩어진 책 사이를 헤집고 오느라 그의 걸음이 미끄러지듯 휘청거렸다.
그럼에도 그는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원망과 절망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가!! 저리 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잽싸게 뿌리쳤다.
그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그런 거 아니야, 여름아.”
“내가 애 낳으려고 결혼한 줄 알아?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어.
여보만 하루 종일 기다리는 사람 같잖아.
나도 뭐든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
하염없이 내 눈물을 닦아주던 그의 손끝이 떨렸다.
“오빠가 미안해. 그런 뜻이 아니었어.
내가 여름이 없이 어떻게 살아.”
턱 끝에서 떨어지는 눈물방울은
그동안 축 늘어져 있던 내 마음을 대변하듯 힘 없이 툭 떨어졌다.
그도 끝내 참지 못하고,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여보는 왜 울어.”
“여름이가 너무 슬퍼하니까.”
“울지 마...”
“이제 그만 울어.”
우린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어두운 밤공기를 닦는 나뭇잎이
바스락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유독 컴컴하고 긴 밤이었다.
결혼식 서약 때,
많은 부부는 힘들 때나 슬플 때 늘 함께하겠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랬다.
어떤 어려움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더라도
이 사람이라면 함께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예상치 못한 해외 생활
그 속에서 마주한 어려움.
그리고 그 속에서 마주한 우리의 민낯.
원래의 나는 회피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아도 잘 말하지 않고, 그게 쌓이면 조용히 인연을 끊어내는 그런 사람.
이번엔 달랐다.
상처와 마주한 나를 그에게 여과 없이 드러냈다.
부끄러운 모습일지라도 그가 나의 이런 모습도 알아주길 바랐다.
그가 이런 내 모습을 싫어하더라도,
이런 모습조차 함께 들고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기에.
아마 그건 결혼식 서약이 준 약속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손을 잡았다.
이번엔 더 단단히.
“여름이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그런 말 한 거야.
여름이 없이 난 여기서 못 살아.
음식도 못 시키고, 음식도 못 해 먹고, 청소도 빨래도 못 하고...”
“흥!! 그럼 내가 여기 있는 게 청소하려고 있는 줄 알아?
내가 음식 하려고 여기 있는 거야?”
아직은 감정이 다 가라앉지 않아
나는 말꼬리를 붙잡아 더 쏘아붙였다.
“에이, 그런 건 아니지.
그만큼 여름이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지.”
"미안하고, 사랑해."
서로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그의 품에서 뒤섞인 감정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밤이 깊어지며, 우리 사이 공기가 차분히 내려앉았다.
그날 밤,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예민한 나를 만나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또 집에서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무던하지 못한 내가 또 다른 짐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바위처럼 그 자리에서 묵묵히 나를 지켜주는 그에게 고맙기도, 마음 한편이 무겁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그를 꼭 안으며 말했다.
“잘 다녀와, 여보야.”
그는 출근길로 향했다.
그날 한국은 밤 9시 반.
할머니가 입원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병간호 중인 엄마에게 전화를 걸려던 찰나,
가족 톡방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얘들아, 밤 9시 30분. 할머니가 소천하셨다.’
잘못 본 줄 알고 다시 읽었다.
‘소천하셨다.’
“여보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그를 다급히 불렀다.
믿기지 않았다. 거짓말 같았다.
멍하니 서서 말했다.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어.”
그는 말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한국을 가려고 손에 잡히는 대로 캐리어에 물건을 넣었다.
무얼 챙겨야 할지 몰라 온 방을 돌아다니며 허공을 헤맸다.
남편은 출근해서 나의 한국행 비행기 표를 알아보고 있던 찰나,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지 마라, 여름아.’
엄마에게 통화 버튼을 누르는 내 손은,
이상하리라만치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