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시작된 여름, 6월의 어느 날, 오전 11시 반.
쨍쨍거리는 햇살이 꿈틀거리기 전,
상견례가 약속된 식당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떨리는 마음을 꼭꼭 숨기고 싶고
들키기 싫어서 그리 급히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이곳에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내가
자리 잡고 앉으니 곧이어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들어오셨다.
의자가 사람 수만큼 드르륵- 소리를 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예비신랑은?
그는 멕시코에 있다.
정갈하고 다채로운 밥상,
숫기가 없는 나는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리고 있을 때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하하하, 여름아, 긴장되지? 우리끼리 알아서 이야기 나눌 테니까 편하게 먹거라."
어머님의 그 말씀에
한껏 긴장으로 세웠던 발끝에 힘을 조금 풀었다.
양가 부모님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셨다.
마치 오랫동안 아시던 것처럼.
그도 그럴 것이 예비 신랑은 우리 아버지의 절친의 조카였다.
어릴 때부터 이 집과 왕래가 잦았던 아버지는 시아버님과
옛날 어릴 적 이야기부터 지금의 삶을 나누시며 대화를 이어가셨다.
피어나는 이야기꽃 사이에서
숫기 없는 나는 혼자서 낑낑대다가
결국 혼자 예쁜 음식들과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넌 뭘로 만들어졌니?' '넌, 어떻게 요리됐니?'
마침내 다과상이 나왔다.
그리고 남편과 영상통화가 연결됐다.
그는 헐레벌떡 일을 마치고 들어와서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있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양복 차림에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참석 못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할게 뭐 있나, 상황에 맞게 하면 되지. 양복 입고 있네?"
"네, 상견례가 있어서 특별히 입었습니다."
"준비성이 참 좋구나. 하하하."
결혼 준비를 나 혼자 다 했다.
웨딩드레스 고를 때도, 식장 계약도, 하나하나 혼자였다.
현실적인 결혼 준비를 하면서도, 마음 한편엔 TV 속 낭만이 자꾸 겹쳐 보였다.
‘혼자 준비하는 결혼’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혼자 결혼에 절실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을까—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쉽지 않았다.
나 혼자만 결혼준비한다고 툴툴거리니
예비신랑은 다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고 싶으니까
정해진 것만 알려달라고 했다.
그의 답변이 나름 흡족하여 크게 반박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고도의 기술에 넘어간 것 같다.
'상황에 맞게 하는 법.'
그 방법은 몇 년 뒤 곧 40을 앞둔 나에게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선택지였다.
늘 내 안에 정해둔 답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 결혼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상견례와 결혼준비는 남편과 같이하며,
한국에 살면서 부모님 생신이나 명절 때는 함께 할 줄 알았고,
결혼하면 2세는 쉽게 생길 줄 알았으며,
결혼 후에도 경제적 활동을 할 줄 알았다.
결혼 후 내가 생각한 모든 계획은
내 뜻대로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과 결과에
맞추는 법, 그리고 맡기는 법을 배워간다.
우리 집에 경조사가 있을 때,
우리 부부의 걸음을 대신해 내 부모님을 위로해 주신 시부모님.
양가 부모님의 생신 때마다 함께 모여 식사하시는 부모님들.
여행 다녀오면 시부모님 선물까지 챙겨 오는 내 동생.
한국 갈 때마다 우리 부부 영양제를 한가득 챙겨주는 시누.
아마도 뜻하지 않았던 멕시코 살이는,
아직 사회성이 우둔한 나에게
어른의 지혜를 한꺼번에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어른의 모습을 배워간다.
어른을 향한 걸음을 내디뎌본다.
언젠가,
나의 느릿한 발걸음으로 지나온
30대 끝자락, 이 시간이
성숙함의 향기로 물들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