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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 지낼 용기

연재를 마치며

by 여름온기

“해외에서는 같은 한국사람들끼리 조심해야 해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끼리 왜 조심해야 할까.


가뜩이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것도 벅찬데,

그런 말은 해외살이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적당히 선을 지키면서 지내면 되지 않을까.

한국에 있든 외국에 있든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조심하는 건 어디서든 당연한 일 아닌가 싶었다.


내가 사는 곳은 보안이 잘 되어 있어 외국인 거주자가 많은 동네다.

이곳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무렵, 마트에 가는 길에 아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름씨, 혹시 마트 가는 길이에요?

제가 아는 사람이 새로운 인물이 동네에 나타났다고 여름씨 사진을 찍어서 보내줬더라고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모르는 사람이 내 사진을 찍어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올라왔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할 일이 많이 없나 보네.’

애써 가볍게 넘기려 했지만 기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내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고,

내가 어디에 사는지 입에 올리고,

사실도 아닌 일을 덧붙여 소문을 만드는 사람들.


무료한 해외살이가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걸까,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걸까.

정답은 알 수 없었다.


요즘 주재원 생활이나 해외살이에 대해 누군가 소셜미디어에 적어놓은 글들을 보며

자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외롭다고, 힘들다고 근처에 사는 아무 한국인이나 사귀지 말 것.

먼저 나 혼자 잘 지내는 방법을 찾을 것.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구나. 내가 틀린 것이 아니구나.'


무료하기 그지없는 생활 속에서 나는 나만의 일을 하나씩 만들어 보기로 했다.

하루의 시간을 붙잡아 줄 원동력이 필요했다.

필라테스를 배우고, 스페인어를 배우고, 스페인어 언어교환을 하고,

교재를 만들어보고, 부업을 고민하고, 명상을 하고, 글을 썼다.


거의 10년 전부터 “언젠가는 글을 쓰고 싶다”라고 말만 하다가 이제야 시작한 브런치 글쓰기였다.

가끔씩 올리는 글에 독자분들이 남겨준 조회수와 하트는 잠잠한 연못 위로 바람이 스칠 때처럼

내 마음을 살랑살랑 흔들어 놓았다.


'예비신랑 없는 상견례' 글이 조회수가 만 단위를 넘겼을 때는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괜히 겁이 나기도 했다.

내가 너무 드러나는 건 아닐까,

내 정체가 들통나는 건 아닐까.


필명은 ‘여름온기’.

따뜻한 아이스크림, 가까운 타인, 여름온기 같은 역설적인 감각이 깃든 단어를 좋아한다.

무엇이든 양면성이 존재했고 나는 늘 그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며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했다.


요즘 우리가 겪는 여름은 숨 막힐 듯 덥고 온기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그 뜨거운 계절 속에서도 달콤 쌉싸름한 아이스크림 하나,

찰나의 시원한 바람은

나를 충분히 버티게 해 주었다.


멕시코의 태양은 선글라스를 뚫고 들어올 만큼 강했다.

마트에서 나와 차로 걸어가며 나는 문득 내 두 다리를 바라봤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너무도 잘 걷고 있어서.


예민하고 불안한 내가

이곳에서 이만큼이나 적응해 있다는 사실이 기특하고 신기해서.

생각보다 이곳에서 훨씬 잘 버티고 있었다.


모국어로 수다를 떨 친구가 없어 이따금 울적해질 때도 있고,

남편이 내게 조금 더 잘해주기를 바랄 때도 여전히 많다.


이곳에서 한국인 친구를 사귀기 위해 애써 노력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혼자 웅크린 채 지내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저 더 잘 지내고, 잘 살고 싶다.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지는 알 수 없지만 혼자 있게 된 이 시간 덕분에 나는 나 자신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과거의 기억이 반추되며 괴로울 때,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여름아, 그래. 기분 나빴지.

내가 다 이해해.

그래도 너, 여기까지 온 거 정말 대단해.

잘 지내고 있고, 잘하고 있어.'


내가 성숙해지는 건 더 강해지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아껴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필요 없는 관계를 흘려보내며,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사람.


외롭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외로움 때문에 나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멕시코의 강한 태양 아래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제 갈 길을 잘 걷고 있던 나의 두 다리처럼,


나는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지낼 것이다.


연재를 마치며


지금까지

느 날 멕시코로 떨어진 그녀》를

지켜봐 주시고 사랑해 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글이었지만

관심을 가져주시고

하트로 응원해 주신 덕분에

제 마음에 오래 간직할 온기가 생겼습니다.


브런치를 하며

여러 작가님들의 글을 읽고,

글을 통해 마음이 몰랑해지는 시간도

여러 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간들 역시

이곳에서의 생활을 버티게 해 준

작은 힘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준비된 이야기로,

다른 주제로

다시 인사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은 많이 춥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건강 잘 챙기시고,

2025년도

각자의 자리에서

따뜻하게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여름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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