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들었어?”
“응? 무슨 소리?”
“타이어 터지는 소리.”
이곳 도로에는 구덩이가 많다.
점심을 포장하러 한식당 앞에 주차하며 움푹 파인 곳을 스친 순간, 오른쪽 앞바퀴가 펑하고 터져버렸다.
피곤함과 불안이 스르르 밀려왔지만, 그 감정을 애써 밀어냈다.
‘어찌 되겠지.’
남편의 단골 식당에서 도움을 청하자 “아는 사람 불러줄게”라는 말은 들었지만,
언제 올진 기약이 없었다.
인천공항에서부터 이어진 이동과 대기, 비행, 경유, 비행.
20시간 넘게 제대로 쉬지 못해 몸은 침대에 어서 눕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래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픈 허리에 복대를 매고 다시 일어섰다.
정비소까지 가려면 바람 빠진 타이어로 급유턴을 해야 했는데,
그건 무리였다. 잠결에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정신을 다시 잡았다.
남편과 방법을 고민했다.
“비상 타이어로 바꿔야 할 것 같아.”
“여보… 해 본 적 있어? 할 줄 알아?”
“해봐야지.”
난 그렇게 남편과 '한 팀'이라는 명목 아래 비장하게 차에서 내렸다.
우리는 트렁크를 열고 비상 타이어를 꺼내려 낑낑거리고 있었다.
남편은 유튜브를 켜서 방법을 찾아보았다.
그때, 빨간 승용차가 옆에 멈춰 섰다.
멕시칸 커플이 창문을 내리며 물었다.
“¿Necesitas ayuda?”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나는 “Sí”라고 말하며 고개를 세 번이나 끄덕였다.
아마 눈빛으로도 '제발 부탁해요.'가 전해졌을 것이다.
커플은 차에서 내려 자세를 숙여 타이어 아래를 살피고, 공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특히 여자분이 더 노련하고 차분했는데, 그 모습이 멋있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작게라도 감사의 표현을 하고 싶어 돈을 건넸지만 그들은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그들이 차로 돌아가 떠나려는 순간, 나는 급히 불렀다.
“잠깐만요! 가지 마세요!”
어쩐지 그 말에 우리 모두 웃음이 났다.
대신 근처 한인마트에서 한국 아이스크림을 소개하고 싶었다.
그들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작은 발걸음으로 뛰어가 티코 아이스크림 두 박스를 사 왔다.
감사하다는 말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그들을 보냈다.
그들을 보내고 나서 문득 생각했다.
'내가 참 인복이 많구나.'
'이 나라에서는 사람이 사는 느낌이 난다.'
나는 한국에서 외딴집에서 자랐다.
겨울이면 마당의 눈 위에 토끼 발자국이 찍혀 있었고,
여름이면 평상에서 파리와 모기를 쫓으며 밥을 먹었다.
가을엔 도토리와 밤을 주워 담으며 작은 수확의 기쁨을 느꼈고,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들은 내 주위를 더 색색으로 물들였다.
사람과 멀리 지낸 어린 시절의 습관 때문일까.
학교에 들어가면서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이 자주 힘겨웠다.
어린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여학생이 다섯 명뿐인 시골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고등학교를 시내로 가면서 낯선 환경 속에선 더욱 작아졌다.
도시 아이들은 당당했고, 나는 그 사이에서 말수가 줄었다.
한국의 정서는 속은 따뜻하지만 겉은 무표정한 경우가 많다.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도 드물다. 그 시선들 속에서 나는 말과 몸짓이 더 굳어졌다.
대학 시절, 미국 유학을 다녀온 언니가 내게 환하게 웃어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왜?’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
나는 어색하게 굳은 표정으로 되받았다.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그저 그 미소에 같이 웃어줄 걸 하는 마음이 남는다.
한국을 벗어나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캐나다에서도, 멕시코에서도
사람들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미소를 건네고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걸.
그 속에서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음에 새로운 경험치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인과 한국어 앞에서는
여전히 몸이 조금 굳고 마음이 예민해진다.
기억 속 오래된 그림자가 남아 있어서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건네받은 온기를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 사이의 온도는 나라가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거구나.
어쩌면 나는 사람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저 이런 따뜻함을 오래 기다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멕시코는 사 개월 만에 돌아온 나에게 이렇게 힘들고도 달콤한 환영식을 해주었다.
며칠 뒤 단단하고 튼튼한 새 타이어가 장착되었다.
그렇게 내 마음도 그 타이어처럼 조금 더 단단한 마음으로
다시 이곳의 삶을 시작해보려 한다.
그리고 언젠가,
오늘 내가 만난 그 커플처럼
따뜻함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내 손을 내밀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