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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외투

by 여름온기

더듬더듬 '디카페인'이라는 단어를 스페인어로 주문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말하는 순간, 카페 직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영어와 비슷해서 더 입에 붙는 "Decafeina(데까이페이나)" 라고 했더니, 인상을 푹 찌푸리더니 "Descafeinado?(데쓰까페이나도)" 라고 한다.

지불을 하고 음료를 받아 뒤돌아서니 등 뒤에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카페를 갈 때마다 점원의 세밀한 표정변화를 관찰하게 되는 건, 그날 그 기억으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본능 때문일지도 모른다.


HEB 마트, 월마트나 길가에서든 외국인인 나를 보고 영어를 쓰려고 한다.

스페인어로 물어봐도 대답은 영어로 한다. 우버기사와 한참을 스페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영어 하는 줄 아느냐고 묻더니, 곧장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누구든 외국인을 만나면 짧은 단어라도 써먹고 싶은 게 만국 공통적인 마음인가 싶다.


곳곳에서 이따금 아예 스페인어를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Habla español?(스페인어를 할 줄 아시나요?)" 묻는 사람도 있고, 아예 못 알아듣는다 생각하고 내 앞에서 웃고 떠든다.


이것이 2025년 12월, 내가 마주하는 편견이며 차별을 느끼는 순간이다.


한편, 재래시장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는 나에게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이를 담으려고 줄 서고 있는데 글쎄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한 봉지 수준으로 한참 동안 엄청나게 많은 오이를 봉지에 담고 있는 것이다.


바로 다음 차례였던 아주머니와 나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어서 아주머니가 내 쪽으로 한걸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Tuvieran que... (그들은 -해야 했어요...) 어쩌고저쩌고"


네? 아직 못 배운 동사의 시제인데. 그래도 이해하고 싶어서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라고 하자 또다시 "Tuvieran que... (그들은 -해야 했어요...) 어쩌고저쩌고."만 들렸다.


여전히 또렷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분위기로 이해한 스페인어는 '저 사람들, 이렇게 많을 담을 거였으면 좀 기다렸다가 담았어야 했어요.'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알아듣는 척하며 같이 웃었다.


내가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으로 보였던 걸까?

내심 기분 좋은 미소가 스페인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번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그 시장의 채소 코너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보았다. 차별 없는 그 시선으로 말을 걸어올 때면 이곳에서 무거운 이방인의 외투를 벗어 둔 기분이 든다.


시장의 투박한 시멘트 바닥 위에서 나는, 잠깐 현지인이 되었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분명히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사람일 텐데 또 영어로 질문도 많이 받아봤을 것이고,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해서 얼마나 많은 수군거림을 대놓고 받아봤을까.

한국에 가서 서툰 한국어로 말 거는 외국인이 있다면, 끝까지 한국어로 대답해 주는 멋진 현지인이고 싶다.


2026년의 나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외투 위에 내려앉은 편견의 공기를 불어내고,
이방인의 외투를 대신 들어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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