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의지적 현상의 엔탈피
X가 처음 나에게 “생물과 무생물 사이”라는 책을 제안했을 때 나는 사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다. 인터넷에 간단히 검색하여 사람들의 독후감을 읽었을 때 까지는 크게 흥미로운 내용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글들에 따르면 아마도 이 책은 생명이란 무엇인지를 바이러스와의 비교 논증을 통해 정의하는 내용으로 보였고, 사실 이는 중고등학교 과학 교과서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식상한 정의라는 것이 당장에 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모든 글들의 첫 시작점에 생물철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결국 나는 생물학도로서 내 길을 시작했고 지금도 따지자면 그 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내 친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일단은 직접 책을 읽어 보고 판단하기로 했고, 읽어보고 나서는 꽤 인상적인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X의 이야기는 2017년에서 시작했다. X가 나에게 던졌던 첫 질문은 “Central Dogma(생명 중심원리)를 처음 배웠을 때 들었던 생각이 무엇인지”였다. 그건 무려 8년 전의 일이었지만 기억은 선명했다. 2017년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오목교역 앞에 있던 야옹이네 책다방이라는 북카페에서 나는 생명의 중심 원리를 처음 마주했었다.
“DNA - (Transcription) - RNA - (Translation) - Peptide”이라는 간단한 한 줄의 요약은 나를 비롯해 모든 생명의 뼈대라고 말하기에는 굉장히 빈약해 보였다. 그러나 반대로 그 빈약해 보이는 하나의 문장이 세상의 전부를 지배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매우 강렬했다. 실은 광오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볼펜으로 노트에 적어 내린 한 줄의 원리에 기대어 생명은 지구 위에 번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별것 없는 성취이지만 그 사실을 배웠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마치 내가 생명의 본질을 엿본 대 학현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그게 착각이었더라도 나를 매료시켜 생명학도의 길로 첫 발걸음을 내딛게 만든 작은 계기임에는 틀림없다.
X도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처음 배웠을 때 센트럴 도그마는 잘 짜여진… 아주 정돈된 알고리즘처럼 보여서, 이런 건 우리 수준에서도 코드를 만들고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어. 너랑 얘기도 했던 것 같은데. 기억하나?"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 나는 이것을 직접 구현하는 코드를 만들었다. 지금은 유실한 내 핑크색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던 그 C++ 파일은 나에게 애정 어린 첫 학업 외로의 공부였다. 일종의 학문적 동심으로 했던 일이고 사실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의 정보적인 특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의미 깊었다. 그러니까 이 말이 유의미한 것이다. 생명이라는 “데이터”.
“지금의 연구는 고등학교 시절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나 이 책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저자가 발간 당시 알던 것보다도 많이 진척되었지,” 그가 설명했다. 나는 주의 깊게 들으려 노력했다. 고등학교 당시에는 내가 생명과학 전공자이고 X는 화학 전공자였지만, 지금의 나는 순수한 생명과학이나 생명공학적 지식이 거의 발전하지 않은 상태이다. 때문에 서울대학교에서 약대를 다니며 연구에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져온 그의 배경은 분명 나보다 풍부했다.
“특히 생명의 정보를 파악한다는 면에서… 크게 발전된 방법이 “Next Generation Sequencing”이라는 것인데 DNA 단편을 만들어서 겹치는 부분들을 통해 DNA 상에서 유전자의 위치를 찾아내고 있어. 또 최근에는 아예 DNA를 특정 단백질의 통로로 통과시키는데, 이 때 어떤 염기가 통과하는 지에 따라서 전압이 달라지는 것을 통해 말 그대로 읽어 버리기도 해.”
전자의 Next Generation Sequencing이라는 내용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후자는 매우 새로웠다.
“그러니까 A가 들어가면 몇 전압, T가 들어가면 몇 전압, C나 G가 들어가면 또 몇 전압… 이런 식으로 DNA 상의 염기를 바로 읽어 버린다는 거지. 유전자 분석 자체는 옛날에도 물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기술이 진보한다면 결국 ‘전장 유전체 분석', 즉 한 사람의 유전체를 통째로 데이터화 하는 기술이 보편화될거야.
이미 휴먼 게놈 프로젝트 때부터 존재했던 기술이지만 나중에는 그게 훨씬 빠르고 간편해질테니, 특정 질환 환자들의 전장 유전체 분석이나 데이터화를 할 수도 있어. 내가 있었던 연구실에서는 실제로 그걸 목표로 하고 있었고.”
X가 부연했다.
단순히 생명공학적 기술의 또 한 번의 진보다, 라는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는 분명 “데이터”인 생명에게 한발짝 다가간 것이었다. 무지한 내가 듣기에 이는 매우 흥미로웠다. 정말 무지하기 때문에 하는 생각일지는 모르겠으나 생명의 정보적 특성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그 정보의 변이나… 말하자면 그 정보가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낮은 확률의 정보 변이를 우리의 통제 아래에 둘 수도 있을까?
생각은 자연스럽게 정보의 “거대함”과 “확률”에 대한 것으로 흘러간다. 나는 방금 그 확률을 통제하는 것에 대해 잠깐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그 변이할 확률이란 것의 다른 이름은 결국 무엇인가? 진화 혹은 진화론이다. 즉 생명이 사멸하는 이유이기에 앞서 번영하는 이유이다. 또한 이것은 생명과학에 있어 하나의 크고 위대한 나침반이자 일종의 교리처럼 여겨지는 진리이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잠깐 표현을 빌려오자면 이는 생명의 정상과학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다.
다시 책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 책의 앞부분은 저자 개인의 서사와 근대 생명과학의 발전 역사에 대한 것이었으나 뒷부분은 생명의 물리학적 해석을 다루고 있었다. 내가 감명을 받았던 것은 후자 쪽이었다. 그리고 이 내용을 읽어보며 나는 진화론이라는 패러다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쯤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다. 그래서 일단은 그런 이야기를 적어보려 한다.
저자는 우리의 몸을 바닷가에 있는 모래 섬에 비유한다. 파도가 한번 그 모래 섬을 적시고 물러가면 모래성의 형태는 유지되더라도 그 속에는 파도가 몰고 온 다른 모래 일부가 섞여 들어간다. 이 과정은 수많은 시간 되풀이되는데, 사실 그 속에서 어느 순간이 되면 원래 있던 모래는 온데간데 없게 된다. 수많은 새로운 모래들이 그 모래 섬을 재구성할 것이므로 모양은 그대로이겠지만.
우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원자를 섭취하여 우리의 일부로 만들고, 기존의 원자들을 밖으로 내보낸다. 그러다 보면 ‘나’가 인식하는 ‘나’는 어느 순간 아예 다른 물리적 실체가 되어 있다. 이 과정은 창생사멸 속 모든 순간 동안 반복된다. 그러니 만약 내가 1년 만에 친한 고등학교 동기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면, 사실 그 시점에 이미 우리 둘은 과거에 서로가 마주했던 것과는 아예 다른 물리적 실체일 것이다.
놀라운 사실이고 섬찟한 사실이기도 하다. 나는 아마 대한민국 대부분 중고등학생들의 생활기록부에 있는 책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서문에서 이런 비슷한 내용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나 또한 중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적어 넣기 위해 그 당시에 가볍게 읽었던 책인데 이 서문의 내용만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으니 내가 이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충격을 짐작할 법하다.
중요한 질문은 “왜 그런가?”이다. 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원자를 새롭게 갱신해야만 하는가. 왜 우리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우리의 일부인 원자를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취해야만 하는가. 내가 이 책을 해석한 바가 맞다면, 답은 다시 한번 거대함과 확률에 있다. 원자에 비해 너무나 거대한 세포라는 계에서 개개 원자에게는 “확률”이라는 압력이 가해진다. 확률압에 의해 일부 원자는 자신이 구성하던 DNA, RNA, 단백질 안에서 그 정상 위치를 이탈한다. 즉 세포의 일부는 늘 정상 기능을 잃는 방향의 압력에 처해 있다. 물리학에서 이르는 '무질서도(엔트로피)'의 증가이며, 자연의 섭리인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증가법칙)”이다.
엔트로피의 관점에서 생명체를 조명하는 것은 꽤나 신선한 관점이었다. 그 논의의 출발선을 이해하기위해 이 지점에서 내가 가장 감명받았던 대목을 언급하고자 한다. 저자는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위대한 물리학자의 통찰을 일부 빌려와 소개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즉 물리로서 생명을 서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었으나 그 내용의 단초가 “크기”라는 단순한 인자인 점은 매우 흥미로웠다. 엔트로피를 논하고 있었는데 왜 “크기”가 핵심인가?
요점은 물리학의 어떤 부분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통계법칙이라는 것에 있다. 쉬운 예시로 우리는 물병에 떨어진 잉크 방울의 확산을 생각해볼 수 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잉크 방울이 물병 전체로 퍼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 확산이라는 물리적 현상은 “용질이 고농도에서 저농도로 이동한다”라는 절대적인 원칙을 담보한다. 그렇다면 이 원칙은 잉크 분자 개개인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지배력을 가지는가? 잉크 방울 속 단 하나의 분자를 콕 집어낸다면 그 분자는 반드시 저농도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다만 통계와 표본의 엄청난 크기에 의존할 수 있다. 잉크 분자 개개는 분명 정해진 원칙 따위 없는 채로 무질서하게 운동할 것이다. 다만 고농도인 곳에는 많은 분자가 이미 위치해 있으며 저농도인 곳에는 적은 분자가 위치해 있다. 따라서 운동을 통해 고농도 위치에서 벗어나는 분자의 수가 저농도 위치에서 벗어나는 분자의 수보다 많다. 그러므로 전체를 보면 분자들이 고농도에서 저농도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즉 이 물리법칙은 원소가 아닌 표본 전체에 대한 통계적 기술에 불과하다.
그래서 슈뢰딩거는 우선 표본이 통계적인 질서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 크기가 커야 함을 언급한다. 우리가 만약 세 개 정도의 잉크 분자로 구성된 계를 들여다보고 있다면 고농도에서 저농도라는 법칙은 지켜지지 않는 완전한 무질서를 관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이어서 이렇게 주장한다. 생명은 설령 아주 작은 단세포 생물일지라도 하나의 ‘원자’에 비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비대하다. 즉 생명은 그 크기로 말미암아 충분한 크기의 표본을 제공하고 질서를 확립하며 무질서도의 증가에 저항한다.
이런 슈뢰딩거의 통찰에 동의하자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크기 논증’을 생명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 시대의 패러다임인 ‘진화론’ 그 이상으로 '크기 논증'은 생명의 본질에 닿아있지 않은가? 이에 대해 나와 X가 논의했던 내용을 정리해보겠다.
“나는 그래서 ‘바이러스’라는 개념이 이 책의 초반부에 제시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 저자는 바이러스의 존재를 밝혀내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담뱃잎 모자이크 바이러스’의 역사적인 발견 과정을 설명했었지..”
나는 먼저 위와 같이 운을 떼었다.
부연하자면 담뱃잎 모자이크 바이러스 실험은 그 크기 성질을 바탕으로 바이러스의 존재 가능성을 시사한 실험이다. 당시 현미경 관찰 기술의 한계로 바이러스는 육안으로 관찰되지 않았으며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실험자는 감염된 담뱃잎을 갈아 용액을 만든 후 거름망을 이용해 세포 이상의 크기를 가지는 모든 여과물을 걸러내었다. 이후 남은 여과액을 담뱃잎에 묻혔는데 놀랍게도 감염이 발생했다. 이는 기존에 알려져 있던 세포보다 압도적으로 작은 크기의 감염원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즉 바이러스는 다른 성질보다도 ‘크기’로서 먼저 알려졌다.
“그러니 바이러스의 이야기를 앞에 놓고 슈뢰딩거의 크기 논증을 여기에 이어 붙이면, 어쩌면 우리는바이러스와의 대조를 통해 크기야말로 생명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을거야.”
“크기가 생명의 고유한 특징이다… 생명을 정의하는 여러가지 특성에 대해서 말하는건가?”
X가 되물었다.
“그렇지,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생물이란 무엇인가’를 논함에 있어서 물질대사나 유전체의 전달 능력 등을 척도로 삼는다고 배우잖아. 그렇지만 사실 생물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었을까 싶은거지.”
위 대답은 내가 대강 기억하는 교과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나는 이 글의 가장 앞에서 ‘생물은 무엇인지 바이러스와의 비교논증… 식상한 정의’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고등학교 시절 생명과학에 관심을 가졌던 학생이라면 익숙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 바이러스의 생물적 특징과 무생물적 특징을 소개하는 한 페이지짜리 부록을 접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 부족한 지식을 보완하기 위해 잠깐 NASA의 엄밀한 정의를 인용하도록 하겠다. 1990년대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외계 생명체 탐사에 앞서 ‘생명체란 무엇인가’를 정의해야 했다. 이들이 논의 끝에 내린 생물의 정의는 ‘다윈의 진화론을 따르는 자립형 화학 시스템(A self-sustaining chemical system capable of Darwinian evolution)’이었다. 이는 물체가 분자구조를 이루고 있고, 이 구조는 자발적으로 형성되며, 물질대사나 생식 등을 조절할 수 있고, 자연선택에 따라 세대를 이어가면 생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물론 NASA의 정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생물학계에서 통용되는 여러가지 다른 정의가 있으므로 엄밀한 생명의 정의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다만 위 사례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점은 진화론과 진화적 성질이 생명을 정의하는 핵심적 요소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로 주장했다.
“만약 바이러스와 생명체를 비교하는 2*2짜리 표를 만든다면 아래와 같아질거야.
그렇다면 진화론적인 성질보다는 크기 성질, 무질서도에 대한 저항성… 이런 것이 생명의 존속을 가능하게 한다고 볼 수 있지 않나?”
X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나에게 동의했다.
“그러니까 너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슈뢰딩거가 ‘생명은 그 크기를 통해 무질서도의 증가에 저항했다’고 한 부분에 착안했을 때 바이러스는 그 크기로 인해 무질서도의 증가에 대항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그러니 생명이라고 보기 어렵다는거지? 확실히 바이러스의 생활사를 생각하면, 오히려 스스로는 그 무질서도의 증가를 극복할 능력이 떨어지므로 크기가 큰 숙주에 기생한다고도 볼 수 있겠네. 그러니까 오히려 진화적 성질보다 크기 성질이 생명의 필요 조건이고.”
내가 생명이 크기를 키워 무질서도에 저항하는 점에 초점을 두어 설명했다면, 그는 반대로 바이러스가 크기가 작아 무질서도에 저항하지 못하는 측면을 조명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 더욱 논의의 윤곽이 잡히는 면이 있었다.
“그렇지, 우리는 바이러스의 ‘변이’가 매우 잦음을 알고 있지만 사실 이 ‘변이’는 다름 아닌 ‘돌연변이를통한 진화’이잖아. 바이러스의 관점에서 보면 말이지. 그 변이가 잦은 것은 바이러스가 생명체에 비해 무질서도 증가에 대한 저항성이 떨어지기 때문이겠지.”
이제 우리는 큰 틀에서 생명이 무질서도의 증가에 저항해야 함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 방법 중 하나가 ‘크기 성질’이라는 것에 역시 동의했다. 그리고 여기서 X는 또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소개한 내용 중에 또 하나 아주 흥미로웠던 것이 ‘부의 엔트로피’라는 개념이었는데,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섭취하는 과정이 엔트로피를 낮추는 과정이라고 소개했어. 이 역시 같은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겠다.”
여기서 X가 언급한 ‘부의 엔트로피’라는 것은 상술했던 ‘모래 섬 비유’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앞서 이 글의 출발선을 다시 되짚어보면, 나는 ‘왜 우리는 우리의 원자들을 끊임없이 갱신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했었다. 이제 생명이 엔트로피의 증가에 저항하는 실체임을 확인했으니 답을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엔트로피 증가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는 ‘부의 엔트로피’를 섭취해 오래된 원자를 대체한다. 마치 부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처럼 우리는 엔트로피 증가에 저항하기 위해 다른 생명체로부터 갈취해 음의 엔트로피를 더하는 것이다.
“그렇지… 바이러스 정도로도 진화적 성질은 충분히 갖출 수 있는데 생명은 그에 비해 지나치게 크다. 또한 생명은 끊임없이 다른 생명을 먹어서 자신의 원자들을 대체하지.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증가하는 엔트로피에 저항하기 위함이지. 결국 이 모든 장치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하므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이겠으나.”
나는 이렇게 말하며 일종의 괴리감을 느껴야 했다. 생명의 본질에 닿아가는 것은 결국 나의 본질에 닿아가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내가 엔트로피의 증가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물리적 실체라는 사실은 현실의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과 결합되기 어려워 보였다. 그럼에도 사실이리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X는 조금 더 우리의 논의를 진전시켰다.
“그렇다면.. 엔트로피에 대항하는 실체로서 우리를 엔탈피의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엔탈피?”
나는 되물어야 했다. 나와 X는 영재학교를 졸업했으므로 기본적인 물리학적 지식을 어느정도는 가지고 있지만, 물리학을 배운지 어언 5년이 된 입장에서는 꽤 오래된 이름이었다. 나는 잠시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해야 했다.
“G=H-TS였나, 그 식에 대해서 말하는건가?”
“그렇지. 정확히는 ∆G=∆H-T∆S. 그러니까 생명이라는 계의 자유에너지 변화량을 음수값으로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엔탈피를 공급하는 게 우리가 하는 일 아닐까, 하는거지. 슈뢰딩거가 말한 ‘부의 엔트로피’ 섭취도 그렇게 보면 ‘엔탈피’를 섭취하는 것일 수 있고… 그렇다면 결국 생명은 본질적으로 엔탈피이고 에너지의 흐름인거지.
‘엔탈피의 섭취’ 라는 개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자. 깁스의 자유에너지 식은 내가 갖고 있는 일반화학 수준의 지식 안에서 가장 명료하게 반응에 대해 설명하는 식이라고 생각해. ∆G=∆H-T∆S 라는 한 줄의 식의 좌변인 ∆G값의 음양으로 반응의 자발성을 판단할 수 있는 건 꽤나 매력적이지. 방금까지 한 얘기에서 부의 엔트로피는 결국 생명이라는 일련의 연속되고 지속되는 반응의 ∆S 값이 음수라는 것을 보다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결국 생명 반응이 자발적이기 위해선, 즉 위 식의 좌변이 음수가 되기 위해서는 ∆H, 엔탈피의 변화량이 음수여야 한다는 거지. 물론, T는 절대온도이므로 절대 음수가 될 수 없으니까.
우리는 살아가며 에너지를 소비하지, 이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이야. 그런데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보자. 사실 생명활동은 ‘엔트로피 증가’ 라는 거대한 법칙에 저항하는 행위이고, 이를 위해선 에너지를 소비하는, 다시 말해 내가 갖고 있는 엔탈피를 소모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는 거야. 즉 생명 활동에 있어서 엔탈피는 일종의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의지’ 인거지. 그 의지가 퍼지고 퍼져서 종국에 다양함을 이룬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태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X가 결론처럼 맺어낸 문장들에 우리는 꽤나 흡족해 했다. 나는 잠시 그의 설명을 곱씹어보며, 그는 자신이 한 설명에 만족해 하며 얼마간 생각할 시간이 지났다. 대체로 X가 한 설명이 그럴듯하며 비유를 넘어 실제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우리의 논의가 도착지에 이르렀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 글의 이 문단이 적히기까지 나의 게으름 탓에 몇 주가 더 흘렀다.
글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민하고 있는 오늘은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이다. 어제 나는 아버지, 어머니, 동생,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할아버지를 모신 탑에 다녀왔다. 할아버지는 재작년 가을에 당신의 삶을 마치셨다. X가 당시 장례식장의 여러 일과 운구를 도와줬었는데 그게 벌써 2년 전이다.
이따금씩 느끼지만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흐른다. 새삼스럽지만 말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때문에 나는 빠르게 늙을 것이고, 우리가 동의했듯이 엔탈피라는 물리적 의지가 다 할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저항하는 한편 삶이라는 인간적 의지는 후손들에게 넘기고 갈 것이다. 생명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의지적인 현상으로서 이해한다는 것은 멋있는 일이었다.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과학의 관점에서라도 내 삶은 저항적 의지이니까. 마치 내 삶 또한 누군가 넘기고 간, 내가 다시 누군가에게 넘겨야 할 의지처럼 느껴진다.
“책, 사람, 경험”이라는 세 가지 글의 주제는 그런 면에서 열심히 살아내고자 하는 내 의지의 실현 수단이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종말 전에 뜻을 번영시키고자 하는 내 삶의 엔탈피들이다. 본디 나의 부족함을 채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보다 뛰어난 사람 앞에 나를 놓는 것이며, 혹은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일단 새로운 경험에 뛰어들어 숱하게 실패하는 것이다. 책에서 이미 내 갈 길을 걸어본 학현의 지혜를 구하였고, 내게 없는 학식을 빌리기 위해 X라는 사람과 토론했다. 또한 어쩌면 무턱대고 브런치 스토리에 가입하여 글을 써 올리는 이 과정 또한 내게 어떤 결과로 돌아올 지 모르는 경험일 것이다.
나는 건국대학교 의과대학에서 X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에서 수학하고 있다. 이러한 신분을 밝힘은 절대 우리가 스스로를 대단히 여겨서는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다. 만족하기에는 보잘 것 없는 성취이며 안주한다면 그 뿐인 성취이다. 내세운다면 더더욱 한심할 것이다. 다만 이것이 첫 글인 만큼 우리의 목적에 대해 적으며 글을 맺으려 한다.
의사가 아닌 의대생이며 약사가 아닌 약대생이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갑절은 많은 우리에게 많은 배움의 길이 앞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같은 분야인 ‘생명’을 탐구하기 위해 우리의 미래를 활용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책, 사람, 경험이 준 배움을 글로 남기고자 한다. 언젠가 우리가 우리의 첫 글을 돌아볼 때 이 문장을 읽으며 부끄럽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첫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