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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투쟁의 기간 _ 버티기로 한 선택에 대해

반성을 위해 적는 글

by 이제현

글은 항상 생각을 갈무리하여 하나로 모아 올 기회를 마련해 준다. 끔찍하게 정신없는 지난 한 달을 보내고 이제서야 생각에 잠길 시간을 여유로 두려 한다. 반성할 것이 너무도 많지만 반성하기 위해 지체할 시간마저 거의 없으므로 짧은 쉼표로 글을 쓰기 위한 하룻밤만 내어본다.


일단 내게 묻고 싶다. 밖으로 보이는 것만큼, 사람들로부터 받는 존경에 걸맞을 만큼 나는 스스로에게 떳떳하게 살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내가 자의적으로 꾸며낸 나의 모습 뒤에서 그늘을 들출 사람은 나 밖에 없으므로 나만이 아는 나의 모습에 대해 나로서 혐오와 환멸을 마음껏 느낀다. 각성해야만 한다. 절실하게.


그래도 엉성하게 살아온 가운데 배운 것은 많다. 글 하나마다 하나씩 정리해볼까 한다.


멀게만 느껴지던 투쟁의 끝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의과대학의 한 단위를 이끄는 학생회장이자 TF리더, 그게 내 자아처럼 여겨지기 시작한지 오래되어 이젠 나의 본질인 것으로 헷갈릴 지경에 이르렀지만, 전시가 끝나면 난 그저 대학생이리라. 그렇게 될 것이 얼마 안 남았다. 이런 생각을 하면 가끔 헛웃음이 나오곤 한다.


아직도 의대생들은 교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작년 2월 악마, 의새, 의주빈, 의마스, 의룡인 등 모멸감으로 범벅이 된 대학생 집단의 투쟁 선두에 섰고, 이 선두에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후회한 것이 매 하루에 한 번은 넘는다. 숱한 번민과 혼돈 속에 이번엔 조금 더 가까이 진심을 들여다본다.


나는 대체 왜 이 투쟁을 하고 있는가? 사실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단 한순간도 임상의사를 꿈꾸지 않았던 학생으로서, 굳이 따지자면 이 투쟁의 이해 당사자가 아니다. 논리적으로 우리가 옳음이야 당연히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몰입한 이유가 단순히 정당성에 있는 것은 아닐테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 것일까. 일단 학생대표가 된 후 사태가 발생하니, 나는 자연스레 내가 진정 바라는 것보다는 나를 둘러싼 사회가 나에게 바라는 내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에 열중했다. 그게 진정 나일까?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들의 목록에 나의 이해관계만을 넘어 타인의 이해관계에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 또한 나의 진정성의 일부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자의로 이 투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결국 많은 것을 잃게 했다. 나는 내가 시작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고, 떠나기엔 죄책감도 느꼈으며, 받고 있는 인정에 뿌듯함도 느꼈기에, 그 모든 것을 종합하여 직에서 물러나지 않고 버티는 선택을 지난 1년 2개월간 해왔다. 그 동안 나는 군에 입대해 내 커리어를 단축할 기회를 잃었고, 건강도 어느정도는 잃었으며, 학업을 비롯하여 자기계발에 몰두할 시간을 잃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려 첫 발을 내딛었을 때 예상치 못한 TF의 업무들에 휘말려 나는 두번째 글을 쓸 여유를 잃었었다.


하면 학생회장이 되어 버틴 게 그 모든 것을 잃게 한 최악의 선택이었나, 그리고 후회하는가. 음… 후회를 자주 하기는 한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아니다. 최악의 선택이었냐,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총점을 매긴다면 나는 작금의 상황에 만족한다고 볼 수 있겠다.


왜? 배운 것이 많기 때문이다. 자기합리화인가? 스스로 그런 의심도 해봤지만… 아닌 것 같다. 무엇을 배웠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하나만 글감으로 삼아보고자 하여 ‘선택’을 주제로 내 생각을 정리해 본다.




얼마 전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선택지가 많고 길이 많으면 그 안에서 어떤 것을 고를지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고, 그게 정말 어렵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잠시 생각해보았다. 유의미한 질문을 받은 만큼 유의미한 답변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나는 오히려 생각이 얕은 편이어서인지 그 친구만큼 사려 깊지 못해서인지 선택에 대해 고민한 적이 많지 않았다. 정말 태생적으로 걱정이 덜한 축에 속하기 때문인지, 실제로 나는 왜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자문해 보았다.


곧 반문했다. ‘길이 여러 갈래이면, 그 길 중에 정답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선택한 길을 정답으로 만들면 되지 않나?’ 이어 생각했다. 내가 해온 선택은 최선들이었나.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뼛속까지 문과 성향이었고, 꿈은 작가였다. 그러나 영재학교를 진학했다. 내 대입을 생각한다면 유리한 결정이었을 리 없다. 입학하자마자 꼴등을 했지만, 그래도 전교권이 되어 졸업했다. 나는 영재학교를 졸업한 후 과학탐구 모의고사의 만점이 50점인줄도 모르던 시절 막무가내로 수능을 치러보겠다고 결정했다. 과외 6개를 돌리며 돈을 벌어 두번째 수능을 치른 끝에 결국 서울대 의대라는 목표에는 못 미쳤지만 건국대 의대에 왔다. 나는 다시 수능을 치를지 현재의 대학에 만족할지 고민해 보았으나 결국 이 곳에 적을 두기로 했다. 지금은 차석자이자 학생회장으로서 이 곳에서 배우고 이뤄낸 것에 만족하고 있다. 나는 VC 인턴 제안을 받았을 때 '모르는 분야가 두려워서 피한다면 발전이 없을 것 같아서' 수락했다. 그 이상의 어떤 근거도 없이 생판 모르는 분야에 두 달을 박았지만 과분한 네트워크를 만들고 나왔다. 나는 학생회장이 된 후 직을 놓을지 이어 나갈지 몇 백 번을 고민했으나 마음은 항상 계속하기를 시켰고, 결국 그 선택이 옳았다고 보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감사할 만큼 많이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학원을 차리자는 동기들의 제안에 또한 큰 고민 없이 수락하였고, 일단 지금은 잘 가꾸어 나가고 있다. 내가 의대협에서 발언할 때 위축됨을 느꼈고 망설임도 있었으나 '할지 말지 고민된다면 일단 하자'는 태도를 실천하고 나의 것으로 만들 기회가 되었다.


돌아보건대, 각각의 선택보다는 ‘그 선택을 수행할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했다.


인생은 정말 많은 우연들의 합집합이자 나비효과로서 발생한다. 시스템의 변화, 정치인이나 권력자의 선택, 만나게 되는 사람, 다양한 경험, 우연히 들은 말 한마디, 별안간 찾아온 기회, 어떤 날 하루의 감정, 뜻 밖의 제안, 아름답게도 그런 모든 것들이 모여 인생을 무작위적으로 만든다. 시간, 돈, 시스템, 경험, 책, 기회, 세태, 세대, 정치, 사람, 말, 정보, 감정, 사고, 집단, 우연, 이 밖에 셀 수 없는 변수들이 인생에는 산재해 있으므로 나로서는 내 인생의 어느 부분도 감히 예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서 흘러가는 안온한 인생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그 많은 변수들이 범람하는 세상 속에서, 오직 하나 내가 온전한 나의 패로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카드가 있다. 오직 나만이 내손에 오롯이 움켜쥐고 강하게 흔들 수 있는 그 하나의 열쇠가 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의 변수가 있다.


“나”다.


그 자리에서 생각을 갈무리해 전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이제 정리해본다. 말 그대로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 하나 마다 생기는 다양한 갈림길에서 매번 정오를 판단하기에 인생을 처음 사는 우리의 지혜는 짧다. 어른 또는 선험자에게 조언을 구할 수는 있겠으나, 그 또한 확률을 높여줄 뿐 정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믿음을 가질 대상은 길 자체가 아닌 길을 걷는 ‘나’이다. 길은 수억 가지로 나뉘겠으나, 그 길을 걷는 존재가 ‘나’라는 사실은 만고에 불변한다.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내 각각의 선택에 대해 그다지 번민하거나 막연한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없는 듯하다. 정답인 길을 선택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길을 정답이게 만들 나를 믿는 것이다.


미래를 가장 잘 예측하는 방법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통제 가능한 변수를 가장 굳건하게 만들어 내세우면 된다. 즉 나를 전면에 내세워 부딪치면 된다.


결국 그런 믿음의 기반이 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노력과 그 최선이다. 다시 현실세계로 나를 잡아 끌어와 분노해본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는가. 당치 않음을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이 역설한 스스로에 대해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에게 진심으로 떳떳할 수 있어야만 한다. 지금 이 순간에 한정한다면, 나는 절대로 그렇지 못하다.


TF 업무의 과중함을 핑계로 미루었던 학원 일들에 대해 반성한다. 엄격하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규율과 전반적인 생활 양식의 붕괴에 대해 반성한다. 진정 내 자신을 향해 의문을 가지기보다 타인의 시선 속에 비친 스스로를 의식했던 나를 반성한다. 그 모든 것들의 영향으로 잠시 해이해졌던 나를 반성한다.


상념은 접어두고, 말은 멈추고, 글은 마치고, 빠르게 실재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반성을 마쳤다면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를 스스로에게 당부한다. 제발. 위와 같은 주장을 당당하게 하기에 최근의 나는 명백히 부족했다. 각성해야만 한다. 나에 대한 나의 신뢰를 회복하자. 우선 당장 내일부터 다시, 미뤄두었던 학원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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