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은행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양가의 반응은 같았다.
그네들은 모두 앉은자리에서 ‘얼음’ 이 되었다. (아버님 빼고)
퇴사를 결심한 시점에는 암진단을 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납득시킬 다른 이유가 필요했다.
유독,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내 눈앞에서 굳어버린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 건 그들이 내 혈육이 아니어서다. 부정하지 않겠다. 물론 내 부모, 형제였어도 내 배우자가 직장을 관둔다는데 “아이고 그런가 힘들었지 이제 좀 쉬게.” 할리는 만무하다. 내 새끼 등골 빼먹겠다는 이야기로 들릴밖에. 게다가 우리는 자녀가 없지 않은가. 육아를 할 것도 아니니 배우자 월급으로 놀고먹겠다는 이야기로 들렸을 따름이다.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는 내 퇴직금이 우리의 ‘부채탕감 프로젝트’에 쓰일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남편도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얼음’이 된 그들을 ‘땡’해주었다. 정말 얼음이 녹듯이 마지못한 표정이 약간 녹아내렸다. 탐탁지 않았겠지만 의견을 내기에는 내가 너무 단호했고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그들은 미약했다.
시집 식구들은 큰 회사에 속해 본 경험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하니 그들 입장에서 그런 ‘은총’을 차버리겠다는 나를 이해할 수도 없고 그저 제발 그 뜻을 거두어 주었으면 했을 것이다. 내 정신적 육체적 건강은 그들의 알바가 아닌 고로 나는 반대급부로 퇴직금이라는 카드를 내놓은 것이다.
당연히 친정은 대학교 때부터 꾸준히 쉬지 않고 돈을 벌어온 내가 잠시라도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수긍을 하였다. 그래도 이것이 나의 약점이 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후에 내가 재취업했을 때 반색을 하였다. 그리고 쉬는 기간 내내 나의 암수술을 방패 삼아 퇴직의 정당성을 내세웠었다. 딸 가진 부모란 참으로 치사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는 퇴직을 쌍수 들어 환영해 주고 그까짓 은행 당장 관두라고 내 편이 되어준 남편이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진다고 덜 쓰고 살면 된다며 배우자의 직장에서 얻을 미래적 가치보다 배우자의 안녕을 택해준 같이 사는 나의 베프. 나에게는 든든한 내 편인 그가 있었기에 시집과 친정의 뜨악한 반응 따위는 상관없이 퇴직 신청 공문이 인트라넷에 올라온 지 15분 만에 전산에 퇴사신청을 마치고 자필 사직서를 작성해서 인사부에 팩스 발송을 했다.
17년 11개월의 은행 생활을 그렇게 15분 만에 끝냈다.
내 퇴직금에 대한 십일조를 기회로 나는 우리 가정이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외벌이가 되었지만 십일조에 적금까지 넣어도 살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해 주겠다고 남편에게 큰소리를 쳤다. 감당은 하나님의 몫이었다.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 아니니....... 우리는 그렇게 남편의 외벌이 시절에 맞벌이 때도 못했던 십일조 생활을 시작했다. 적금도 소소하게 넣기 시작했다.
그에 부합하여 남편은 회사 주변에 점심 먹을 데가 마땅치 않다는 이유로 도시락을 싸주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미 그는 나에게 그가 한 달에 쓰는 용돈과 동일한 금액을 생활비가 아닌 순수한 내 용돈으로 내놓았는데 도시락도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도시락 한번 싸는데 5천 원을 공임으로 주겠다는 것이다. 불규칙한 출퇴근 시간 때문에 한 달에 열 번 정도 도시락을 싸면 되었는데 그 돈으로 집에서 우리가 마실 더치커피를 구입하는데 쓰기로 했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컴퓨터 방을 게임방 삼아 게임을 하던(오래된 게임이 다시 출시되었을 적에 피곤을 떨치며 그는 게임을 했었다.) 그에게 라면이나 커피를 제공해서 부수입도 올렸다.
이건 우리가 일상에서 찾은 소소한 놀이였다. 이런 역할극 같은 부업으로 남편은 내가 백수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프리랜서 가사노동자였다.
그 시절 우리가 살던 빌라의 테라스가 꽤 넓어서 꽃과 채소를 심었었는데 거기서 수확된 미니 오이와 고추, 대파도 도시락 식재료로 잘 쓰였다. 제육볶음, 오징어볶음, 오이무침, 두부조림, 장조림, 진미채 볶음, 멸치 볶음, 오이소박이 등으로 도시락을 부지런히 쌌다.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는 기억이다. 달력에 도시락 싼 날을 동그라미 쳐 놓고 남편 월급날 뽀돗이 수금을 했다. 도시락 공임비는 남편의 그 약소한 용돈에서 나오는 것이니 5만 원을 넘지 않게 10번을 넘어가면 한두 번은 서비스라고 선심 쓰는 척도 했다.
도시락을 싸고 살림을 한다 해도 워낙 외부활동이 없던 때라(수술 후였고 코로나 시절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양가 부모님을 위해 여름 보양식으로 소꼬리를 고아서 가져다 드리기도 했다.
아내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 절을 한다던가.
명절에 시집에 가서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나는 ㅇㅇ 이가 집에 있어서 너무 좋다.”라고 혹시나 백수가 된 아내에게 누가 구린입이라도 뗄까 봐 본드를 붙여버린 남편이 썩 마음에 들었다. 소꼬리를 이틀을 꼬박 고아서 일일이 냉동용기에 담아 얼려서 시집에(친정에도 조금은 갔다) 가져갈 만큼은 남편이 예뻤다. 그리고 시아버님이 여름 들어 유난히 기운이 없어 보이셨던 것이 마음이 쓰였다. 확실히 직장을 그만두고 있으니 마음도 시간도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돈 벌면 쓰기 바빴던 맞벌이 시절보다 40대에 대출 ‘0’ 원이 된 외벌이 시절이 우리에게는 더 풍족했다. 불필요한 지출은 하지 않았고 내가 가사노동을 전담하니 외식도 배달도 훨씬 덜 할 수 있었다. 물건 하나를 구입해도 내게 꼼꼼히 따지고 가격을 비교할 시간이 있었기에 정말 필요한 것만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남편의 월급날이면 예전에 아빠 월급날처럼 외식을 했다. 신랑은 고기 구워 먹는 걸 좋아해서 동네 삼겹살집, 갈빗집, 양꼬치 집을 돌아다녔다.
어느 비 오는 월급날 남편이 다소 늦게 퇴근을 했을 때는 슬리퍼를 빗 속에 찰박 거리며 마트에 가서 마감 세일로 저렴하게 소고기 등심을 사다가 구워 먹었다. 비에 발이 젖어도 손 붙잡고 마트에서 집에 오는 길이 아이처럼 즐거웠다. 월급날이 카드 값이 스쳐가는 날이 아니라 온전히 두 식구에게 풍족한 날이 되었다. 혼자 풍진 세상 사회생활 중인 남편을 한껏 치켜세워주기도 했다.
수입은 줄었지만 대출상환 할 것이 없고 카드 값이 빠져나갈 일도 별로 없으니 마음도 편하고 홀가분했다. 지금 돌아봐도 우리의 그 시절은 아기자기하고 행복했다.
외벌이로 싫은 내색 없이 버텨준 남편에게 내가 퇴사하고 한 번쯤은 유럽여행을 다녀오려고 쥐고 있던 돈을 풀어 임플란트를 해주었다. 어느 날 도시락에 시어머님이 주신 꼬막무침을 넣었더니 껍질을 씹어서 앞니가 부러졌다 하여 치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촬영해 보았는데 생각보다 치아상태가 전체적으로 무척 심각했다. 이제껏 그 치아로 음식을 먹고 산 게 신기 할 따름이었다.
남편은 아이도 없는 부부사이에 외벌이로(내게 퇴직금이 있다 해도... 요즘 젊은 부부들은 생필품 사는데도 칼 같다고 하니) 지낸 2년의 시간 동안 억울한 기색 없이 잘 지내주었다. 해서 나도 천여만원을 임플란트 비용으로 내준 것이 아깝지 않았다.
유럽은 이제 다시 출근을 하게 되니 갈 시간도 마땅치가 않다.
그 시절을 지내면서 질병도 물질의 어려움 등의 역경도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다는 걸 우리는 경험했다.
우리는 한 팀이고 서로의 ‘내편’이며 팀워크가 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