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죽일 놈의 사랑

김영배 목사의 <호세아사랑학>

by neveres

지금으로부터 근 십여 년 전 나는 7살 때부터 다녔던 교회 ‘청년부’에 잠시 출석했었다.


고등부 이후로 대학부에 적응이 되지 않아 대예배만 드리고 도망치듯이 집에 가던 나를 고등부에 같이 다니던 친구가 데려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전혀 기대치 않았는데 이 청년부 예배에서 목사님의 설교가 나에게 너무 은혜가 되었다.


교회에 다니고 처음으로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필기를 하고 성경책에 줄을 그어 가며 설교를 들었다. 그전에도 후에도 그런 적은 없었다.


‘아 이제 첫째면 둘째와 셋째는 언제 나오는 것인가?’하면서 설교가 끝나기만을 노심초사하던 내가 설교시간에 필기를 하다니... 주여! 할렐루야! 정말 할렐루야였다.


설교 내용은 이제 시간이 흘러 생생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느 날 목사님께서 천국에 가면 영화를 만들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살짝 울컥하셨던 것이 생각난다. 그것이 나에게 도전이 되었다.


천국이란 교인인 나에게도 구름 위 어딘가에 환상의 세계 같은 이미지였는데, 목사님의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는 천국에서도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나중에 천국에 가서도 영생을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이고 너무 당연한 것인데 그런 생각을 못하고 매주 교회에 가서 ‘복 주세요’만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목사님은 신학을 하시기 전에 영화 일을 하셨던 분이셨다. 나도 십 대 때부터 꽤 오래 영화에 미쳐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목사님의 말씀 전하는 방식이 나에게 맞아 은혜가 되었나 보다.


글 써서 먹고살 수 있으면 은행 때려치운다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했었는데 나도 천국 가면 글을 쓰고 싶다고 그때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이 땅에서 주님 나라를 살아가는 심정으로 밥벌이는 아니지만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어느 날 돌연 목사님이 사임을 하셨고 나는 그 설교를 다시 들을 수 없었다. 어느 교회로 옮기셨는지 개척을 하셨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교회에서 그걸 누구한테 묻는 것도 꺼려져서 인터넷으로만 검색을 해 보곤 했는데 몇 년이 흘러 이 분이 정말 검색하니 나타나셨다.


책을 내셨던 것이다!


해서... 조심스레 꺼내보는 오늘의 ‘나의 사랑하는 책’은 ‘김영배 목사님’의 <호세아사랑학>이다. 이 글이 목사님께 누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구약성경의 ‘호세아’ 서에 대한 책이다.


교인이라면 누구나 일 년에 한 번쯤 설교 시간에 이 불쌍한 예언자 호세아(지금으로 치면 목사님)라는 분에게 하나님께서 ‘미션임파서블’에 가까운 명령을 내리셔서 인생을 꼬이게 하신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음란한 여자를 만나 결혼해서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이 억하심정에 가까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착하고 믿음 좋은 이 호세아가 고멜이라는 여자를 만나서 애 셋 낳고 바람나서 뛰쳐나간 고멜을 도로 값까지 치르고 데려와서 무려 다시 ‘사랑’하라는 말씀에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우리가 아는 호세아서의 내용이다.


그리고 설교시간에 들어 알 듯이 집 나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내용이라는 것 정도는 흔히 들어온 이야기이다.


<호세아사랑학>에서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은 일단 이 고멜이란 여자에 대한 해석이었다.


늘 목사 사모가 야한 옷에 야한 화장을 하고 나타난 것 같이 묘사되었던, 혹은 범생이 호세아가 어느 화려한 클럽에라도 억지로 가서 대시했을 것 같은 여자, 평범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여자로만 이야기되는 고멜을 그 시대의 평범한 여자였을 것이라고 해석한 점이었다.


아니, 이 여자가 평범했다기보다 이 여자의 ‘음란’함이 그 시대에 특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시대 자체가 온통 ‘음란’하여 이 음란함이 도리어 ‘기본값’ 일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연상호 감독의 ‘계시록’이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목사 사모가 떠올랐다. 그저 평범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참한 목사님 사모님이 사실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설정의 이 영화에서도 그녀는 그냥 교회에서 흔히 보는 평범한 자매였다. 특별히 드러내놓고 음란해 보이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설정이 크게 충격적이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기에 호세아서의 시대와 지금 이 시대가 그 음란함과 타락, 성과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는 점이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가서 일부러 찾을 것도 없이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여자. ‘고멜’은 그런 여자였던 것이다.


그러니 찾는 것도 수월하고 어찌 연애해서 결혼하고 아이 낳는 것까지도 순조롭게(?) 순종할 수 있었는데 이 여자가 바람이 나서 급기야 집을 나갔다. 이것만도 인생 폭망이구나 싶은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복장을 뒤집어 놓으신다.


돈까지 싸들고 가서 데려오란다. 애들한테는 엄마가 필요하니 그도 어찌 이해하겠는데 데려와서 ‘사랑’을 해주란다.


‘사랑’이요!?


나 같으면 “저한테 무슨 유감 있으시냐고!?” 따졌을 텐데 목회자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기에 호세아는 또 순종한다.


내가 아는 그 ‘사랑’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다시 그녀를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가슴 떨리고 그런 여자로 볼 수 있었을까?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랑, 그 흔한 사랑이라면 가능했을까?


호세아서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어떠한 것을 해주는 것, 상대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에게 선한 것을 해주고 때로 그를 위해 냉정해지기도 하고 힘든 역할을 수행해야 할지라도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한창 뜨거울 때만 존재하다가 어느 날 재만 남아버리는 그 ‘불타는 사랑’ 말고 ‘좋아 죽겠다’가 ‘너 때문에 죽겠다’고 변해버리는 사랑 말고


영원히 변치 않는 약속이자 상대를 용납하고 오래 참는 사랑.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사랑’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일단, 제일 가까이에 내가 가장 사랑해야 하는 상대인 내 남편. 애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 한 명 사랑하면 그뿐인데 이조차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네’가 뭘 ‘안 하는 것’을 보지 말고 ‘내’가 ‘너’한테 뭘 ‘해 줄 것’을 생각하고 실제로 행하는 것이 ‘사랑’인 것을... 나는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랑’을 제대로 못해온 것 같아 조금 미안해진다.



내 남편이 아무리 게으름을 부리고 죽지 못해 집안일에 동참한다 한들 아무렴 내가 주님 앞에서 게으르고 잘못한 것들에 비하랴. 그래도 우리 주님은 ‘이 죽일 놈의 사랑’을 멈추지 못하시고 나를 멱살 잡아 오늘 이렇게 주님 앞에 이 정도 거리까지 데려다 놓으셨는데... 내 남편은 적어도 멱살잡이까지는 하게 하지 않고 몇 번 얘기하면 듣지 않느냐 말이다. 내가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소개와 감상이 다소 유치하게 마무리된 것 같아 목사님께 죄송하지만 더 심오한 내용은 독자들께서 직접 책을 통해 읽어보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호세아서에 대한 신선하고 통찰력 있는 해석과 동시에 호세아 시대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연관 지어 말씀에 대한 이해를 돕는 충실한 안내서가 되어줄 <호세아사랑학>에서 사랑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함께해 보시기를 권해본다.

이전 04화그럼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