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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Jul 19. 2023

놀고들 있구먼

사는 이야기

몇 년 전이었더라..... 기억이 가물가물,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주말 사생을 갔다. 충청도 어디쯤, 익어가는 가을 속에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푸른 하늘을 이고 타오르는 나무들은 저 붉고 노란 물감을 어디에서 공수해 저리 뿜어내고 있을고. 필시 저 아름드리를 떠받치는 땅 속에는 붉은 강이 흐를 게야....... 가을 서정 슬슬 발동이 걸렸다. 


런데다 오전 사생을 마친 뒤 사람들과 모여 술을 대여섯 잔 거후로니 정신이 몽롱다. 부끄러움 없이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노래까지 한 곡조 뽑고 나는 아예 홀로 낭만이 절정.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그림은 일찌감치 작파하고 술만 마시다 짐을 싸서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가을의 정취에 푹 빠져 어느 집의 처마 아래를 지나고 있을 때, 같이 걷던 유선생이 말했다.


"미미 씨, 여기 좀 봐요. 땅바닥에 작은 구멍들이 쪽 줄을 지어 뚫려 있네요."

"어머, 뭐죠? 간격도  크기도 일정해요. 왜 이런 게 생겼을까요?"

두리번 거리다 위를 보니 처마가 슬레이트로 둘려있다.

"아, 저기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생긴 건가 봐요. 위치가 딱인데요."

"음, 미미 씨, 그러네요. 바닥이 이렇게 단단한데도 구멍이 생기네요. 아, 빗방울 대단해요."

우수에 젖은 미미 씨,

"그러게요. 작은 몸을 부숴가며 애쓴 세월의 흔적 같아요."


마침 대문을 열고 나온 주인장이 우리의 대화를 다 었다는 듯, 애매한 표정으로 한 마디 툭 던졌다.


"공구리 친 날 비왔슈~."

아.......


낮술이 확 깼다.

'아주 대낮에 놀구자빠졌구먼.' 하는 촌부의 핀잔이 마음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덧말: 스케치를 배우고 싶어서 사생을 했었다. 물론 그림을 그리는 날보다는 술을 마시는 날이 더 많았다. 뭔가 하려고 마음 먹었을 때 그것을 열심히 하면 좋겠지만, 난 언제나 절정에서 한 걸음 빗겨 서있다. 인생의 모든 국면이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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