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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석 Aug 10. 2022

우연, 유일

22년 1월 26일

사람들은 유일성에 열광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많은 이들이 열광할수록 그 주체는 유일성을 잃는다. 유일한 것을 찾고, 그 성질이 잃는 것을 경험했음에도 계속해서 유일함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유일함이 조금 빛이 바랬더래도 증명된 유일함을 좆는 사람이 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유일성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요즈음 오직 유일한 것은 없다고 보인다. 하지만 유일하지 않은 것은 없다. 오직 유일하지 않은 것은 마음 속에만 있을 뿐 형체를 가진 것과 시간의 영향을 받는 것 중 유일하지 않은 것은 없다. 거대한 공장의 레일에서 아무리 같은 것을 찍어낸다 해도 잘린 비닐의 아주 끝부분이나 종이를 구성하는 펄프의 구성 같이 미세한 부분까지 같을 수는 없으며, 그것이 사유된 시간과 그것에 스며든 마음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순간은 없다. 시간은 가장 유일한 개념 중 하나이다. 아날로그를 정의하는 말이 '시간의 따라 연속적으로 변하는 물리량'인 것처럼 시간은 단 한번도 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사진은 순간을 담는 도구이다. 매 순간이 유일하기 때문에 매 순간의 모든 사진은 유일하고, 각자의 의미를 갖는다. 의미는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풍선 안의 공기와 같아서 대기의 온도나 압력, 그리고 매 순간 가지는 마음에 따라 무에 가깝다가도 늘어나고, 특별해지기도 무의미해지기도 한다. 즉 무의미하다 하여 유일한 것도 무의미해질 수 있고, 거의 무의미에 가까운 것도 오직 고유해질수 있다.


유일한 것들 천지 사이에서 오직 고유해지기 위해서는 마음과 시간 말고도 정성과 어긋남이 필요하다. 정성이란 매 순간 진심을 다해야 한 웅큼 만들어지는 재료이며, 어긋남은 우연이다. 


오래된 마을에는 으레 커다란 나무가 있다. 그 나무들은 한 때 나무의 수호목이었을 수도, 아니면 그저 오랫동안 자리에 머무른 채 뽑히거나 잘리거나 새로 심겨지거나 혹은 새로 자란 이웃의 나무들보다 커다란 덩치를 가진, 그렇게 그저 큰 나무일 수도 있다. 전자는 정성이지만 후자는 우연이다. 수호목에는 마을 사람들의 정성이 모인다. 한 웅큼씩의 정성이 나무에 모여 그곳에는 전설이 생기고 의미가 생기며 신령이 깃들고 오직 고유한 것이 된다. 그리고 우연히 양지 바른 곳에 뿌리를 내려 말라 죽는 것을 피하고, 잘림을 면하고, 산불과 번개를 피하고, 심기가 불편한 촌장과 권력자의 눈을 피한 그냥 그저 커다래져 버린 나무 또한 오직 고유한 것이 된다. 그것이 그 크기와 시간만으로 생긴 유일성이다. 제주 동쪽 성산일출봉이 가까운 종달리에는 그렇게 커다란 나무가 두 그루 있다. 그리고 사진 속 집에 기대어 어딘가 조금 불편해보이는 자세의 나무는 명백하게 후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종달리는 신기한 마을이다. 아무것도 없는 외진 바닷가 마을이 마음을 끄는. 촘촘한 듯 듬성히 자란 죽순처럼 솟아난 작은 집들 사이로 시야가 멀리 뻗는다. 높은 곳에서는 아랫동네가, 아랫동네서는 바다쪽으로 펼쳐진 넓다란 평야가 보인다. 아랫동네쪽에 위치한 오래된 나무는 세찬 제주의 바닷바람을 맞으면서도 느리게 가지를 흔들며 온 마을을 내려다본다. 마을에는 이따금씩 새로 지어지는 신형 건물의 비계를 설치하는 듯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래도 여전히 조용하다. 


그곳에는 조용이 소리를 차분히 껴안는다. 지배하기 보다는 따듯하게, 하지만 빈틈없이 껴안고 있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 새의 소리, 마을 주위를 둘러싼 도로에서 자동차와 버스가 만들어내는 바람소리, 개 짖는 소리, 나뭇잎이 서로를 비비는 소리는 모두 조용에 묻힌다. 마치 그것이 무엇이든, 마을의 공기가 그것을 금세 삼켜버리는 것처럼.


2019, 종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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