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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석 Aug 07. 2022

별처럼 빛나는 흑색 바다

19년 2월 12일

어느 것이든지 한계가 있다. 여행자로서 파리에 와 3주가 지나자 한계가 찾아왔다. 가고 싶은 곳은 많았고 시간도 많았다. 돈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끼니를 챙겨먹을 돈과 교통비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여차하면 쓸 수 있는 비상금도 있었다. 그럼에도 움직이기가 싫었다. 방에 누워 핸드폰을 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옆 건물의 까르푸에서 간단한 것들을 사 간단히 먹었기 때문에 지출되는 돈도 현저히 줄었지만, 그럴수록 돈에 얽매였다. 내 돈으로 예약하지 않은 하루에 거진 오만원 가까이 하는 방값이 계속 생각났다. 인스타그램에 계속 무언가를 올리고 내리고를 반복하자 한국에 있는 친한 형이 연락이 왔다. 거기까지 가서 뭐하는 짓이냐고. 어차피 마음에 여유를 갖고자 찾아온 곳이니 집시도 지린내도 없는 방에서 여유를 갖는 것이 무어가 나쁘냐 한편으로 생각했지만 한편이 아닌 다른 모든 면으로는 영혼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을 오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영혼의 낭비'라는 단어는 심보선 시인의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라는 책에서 접한 뒤로 의식의 제일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단어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아무튼, 그랬다. 나는 나를 낭비하고 있었다. 한계의 초점을 바꾸어야했다. 내가 느끼고 있는 한계는 여행자로서의 한계였다. 여행자는 새로운 곳에 왔다는 설렘에서 힘을 갖는다. 공간의 익숙함이 설렘을 이기고 귀찮음이 호기심을 이기면 한계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낮선 곳의 여행자가 되면 되겠다' 라는 생각의 종착점이 바로 니스였다. 이유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바다가 너무 보고싶었다. 게다가 책에서만 지겹도록 보았던 지중해가 기차 몇 시간 거리에 떨어져있었다. 왕복 기차표와 5일치 숙소를 예약했다. 3일은 호스텔, 2일은 호텔로. 파리 북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6시간 남짓을 이동했다. 마르세유와 깐느에 기차가 멈췄을 때는 내리고 싶은 충동이 가득 들기도 했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언젠가를 기약하며 꾹 참았다. 이제는 저 멀리로 간 친구의 강아지 두리를 꼭 닮은 건너편 좌석의 강아지는 깐느와 니스 사이에서 내렸다. 해가 4분의 3정도를 가르킬 때 쯤 니스에 도착했다.



역 앞 경사로의 난간에 앉은 남자 무리 중 한명이 나에게 "짜이찌엔"이라며 인사를 했다. 대꾸가 없자 다음은 "곤니치와". 그의 눈에선 악의를 읽을 수 없었다. 내 눈이 너무 작은 것일수도. 호스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거리로 나와 맥도날드에 가 불고기 버거인지 빅맥인지를 먹은 후에 5분쯤 걷자 바다가 나왔다. 수많은 예술가를 매료시킨 남프랑스의 지중해. 르 코르뷔지에가 죽어서도 보고싶어하던 니스의 바다가 나왔다. 해변을 따라 잠깐 걷다보니 급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기차가 너무 길었던 것이다. 호스텔로 돌아가기 위해 걸어온 길을 향해 몸을 돌리니 이미 저편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해가 보였다.



파리에서 출발하기 전 카메라의 필름을 갈아끼웠다. 흑백 필름이었다. 운이 좋게도 파리에 있는 몇 주동안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컬러 필름을 많이 쓰다보니 흑백 필름이 지나치게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스에 도착하자마자 그 성급한 결정을 후회했다. 남은 4일이 오늘만치 날씨가 좋길 바라면서 카메라를 연신 찰칵거렸다. 그리고 나온 결과 중 하나다. 해가 짐과 동시에 구름이 짙게 깔렸다. 아니, 구름은 원래 그곳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강렬한 해와 바다가 반사하는 빛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깊고 밝은 파란색으로 지중해를 비추던 해는 피처럼 붉은 색으로 구름을 물들였다. 절대반지가 만들어진 모르도르의 용암이 연상되는 붉은 색이었다. 그 빛이 강했는지 현상된 사진에는 별처럼 빛나는 점들이 구름 위에 놓여져 있었다. 하늘도 바다 같았다. 잔잔한 호수의 표면이 하늘을 반사해 호수와 하늘이 닮는 것과는 다르게 사진에서만 느껴지는 그런 닮음이다. 구름이 펼쳐져 있고, 초원이 펼쳐져 있고, 바다가 펼쳐지고 나무가 펼쳐지는 것에서 오는 동질감이다. 니스의 바다엔 밤과 낮의 구별없이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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