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7월
다시 건축의 역할로 돌아가서 하려했던 이야기를 계속해보면, 책을 사고 카페에서 잠깐 읽다가 가수 예빛씨의 리허설을 보고, 강아지 아름이와 인사를 하고 카페의 사장님과 책방의 사장님과 인사를 하고 잠시 근처 숙소에 가서 샤워를 했다. 꿉꿉한 날씨 탓에 한나절 입은 옷이 습기를 먹은 빵처럼 눅눅해졌기 때문이다. 공연은 8시 시작이었지만 7시부터 입장할 수 있었고 오는 순서대로 자리를 정할 수 있었으므로 7시 10분쯤 다시 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다 말다 해 중정의 입구에서 입장확인을 하며 우비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카페 사장님이 구워주는 초당옥수수와 빨대를 꼽은 버드와이져를 마스크 너머로 홀짝홀짝 빨아먹고 있다보니 날이 금세 어둑해졌다. 레코드 샵 건물에서 나오는 빛과 옥수수를 굽는 불 말고는 모든 불이 꺼지고, 해가 진 후의 잔광이 지붕 위를 비추었다. 이윽고 공연이 시작되고 우리는 떨어지다 말다 하는 빗자락에 우비를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며 공연을 보았다. 옥수수와 지고 남은 햇빛과 빨대를 통해 마시는 맥주와 그의 음악과 이곳저곳 출몰하며 사진을 찍는 책방 사장님과 곡과 곡 사이 마이크를 통해 말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어렸을 때 콧잔등에 나비가 앉았었다 같은)이 하나로 섞였다. 평소라면 감흥없이 지나쳤을, 아예 어두워지기 전 투명한 회색 빛 하늘이 꽤 멋졌다. 순간 내 안에서 건축의 의미가 흔들렸다. 행복한 순간의 효율적 공유를 위해서는 어떤 건축적 기교가 필요할까? 멋진 구조와 멋진 파사드와 멋진 공법이 이 공간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까? 물론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중정의 형태와 건물에서 중정을 바라보는 창의 형태와 레벨의 차이, 건물의 외부와 중정과의 시선의 교류와 차단에 따라 그 분위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내 안에서 흔들린 것은 그 순서이다. 그 공간에서 건축은 첫 번째가 아니었다. 건축이 해야 할 일은, 그 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사랑을 불러일으킬 만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조정하는 것이다. 둑을 따라 물길이 논으로 흘러들어오고, 강물이 바다로 향하는 것처럼 건축은 둑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물은 사람이다.
같은 느낌을 다른 곳에서 한 번 더 느낀 적이 있었다. 가파도가 가까운 서귀포의 왼쪽 아래 구석에 있는 활엽수 게스트하우스다. 대학교에 다닐 때 방학이나 시험기간 - 건축과는 시험을 보는 과목이 타 과보다 적기 때문에 시험기간에 짧은 여행을 갔다 올 수 있다 - 마다 혼자 훌쩍 제주도에 갔었는데, 한번은 친구의 추천을 받아 숙소의 사진도 보지 않고 예약을 했었다. 막상 찾아간 게스트하우스는 말그대로 '옛날'건물이었다. 화장실과 침실의 건물이 따로 있는, 오래되어 금이 간 벽에는 흙을 발라 놓은, 그다지 크다고 할 수도 없는 내 키보다 층고가 낮아 구부정하게 서서 약하디 약한 물줄기로 샤워를 해야하는 그런 납작한 집이었다. 하지만 아주 편안했다. 우리는 때때로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행복이라는 단어에서 팍 하고 머릿속에 상상되는 장면은 몇 없다. 핸드폰과 컴퓨터에 수많은 장면이 손쉽게 저장되고 그것을 꺼내어보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허공에서 행복을 상상해내기 힘든 그런 세상이지만 그 몇 장면 중에 그 때의 기억이 있다. 숙박객은 나를 포함해 두 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마저도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나가는 시간이 다른지 아침에도 마주치지 않았었다. 저녁에 간단하게 먹을 것을 사와 식당건물(물론 따로 있었다)에서 중정을 향해 난 커다란 유리문을 보면서 먹고 있었는데 굵직한 빗방울들이 떨어지지 시작했다. 제주도에서 흔히, 그리고 갑작스레 만날 수 있는 그런 비였다. 식당 내부의 온도는 조금 내려갔고 유리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커졌다. 보통 남자의 발자국 크기의 두 배정도의 지름을 가진 돌들 사이 풀밭으로 빗물이 찼다. 식당에는 책이 몇 권 있었고 나는 맥주와 삼각김밥인지를 조금씩 까먹으며 그 광경을 보다가, 책을 읽다가를 반복하면서 꽤 오랜시간 자리를 지켰던 것 같다. 화장실과 부엌과 침실과 베란다까지 끼워져있는 7평짜리 원룸에서 이런 광경을 느끼기는 어렵다. 10억원부터 60억원에까지 팔리는 한남 더힐 아파트에서도 이런 광경은 느끼기 쉽지 않다(아마도). 방음도 잘 안되는 얇은 유리창과 이리저리 나누어져 중정을 공유하는 옛날의 건물 구조와 비가 오면 습하고 해가 강하면 건조해지는 그런 건물에서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다. 최근 유리창 광고를 보면 건너편에서 아무리 무어라고 소리를 내도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로 편안한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지금은 그런 시대다. 창 건너편의 모든 소리는 나의 사생활을 방해하는 소음. 창 안의 이곳은 내가 원하는 온도와 습도를 맞추는 인큐베이터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은 아니다. 건축은 그렇게 복잡하다. 완벽에 가까운 기술을 도입할수록 완벽에서 멀어지는 것이 건축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