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랄리에게 보내는 응원

2025-1 11주차 여영추 <무스탕: 랄리의 여름>

‘여자는 순결하고 정결해야 하고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해. 사람들 앞에서 크게 웃지 않고 공격적인 행동을 하면 안 되고.’


터키의 다섯 자매는 바닷가에서 남자아이들과 목마를 타고 놀았다는 이유로 처녀성 검사를 받는다. 순결을 지키고 결혼을 하기 위해. 아이들의 방에서 휴대폰, 컴퓨터 등 순결을 해칠 수 있는 물건들이 사라진다. 집의 담장은 더욱 높아지고 철창은 고쳐진다. 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감독과 앨리스 위노커 공동 각본의 <무스탕: 랄리의 여름> 영화는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이야기한다.


무스탕1.jpg


걱정으로 포장된 억압- 정숙, 순결 그리고 결혼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다. [1]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은 대상화되고, 사회가 정한 바람직한 여성상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객체화되고 평가받는다. 영화 속 삼촌과 할머니도 아이들에게 정숙함과 순결함을 강요한다. 남자와 함부로 말을 하면 안 되고, 어울려서도 안 되며, 난동을 피우는 사람을 조심하기 위해 축구 경기를 보러 가서도 안 된다. 이러한 어른들의 반대와 금지는 안전과 명예를 위한 것으로 포장된다. 가부장제가 가지는 폭력성은 <무스탕: 랄리의 여름>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성의 세계 한가운데에서 여자들에 의해 키워진 그녀들의 통상적인 운명은, 여전히 그녀들을 남자에게 실질적으로 종속시키는 결혼이다. [2] 아이들의 정숙하지 못한 행동이 계속되자 신부수업이 시작된다. 할머니는 첫째부터 차례로 결혼시키기 시작한다. 둘째 ‘셀마’는 얼굴만 알던 남자의 가족이 그녀의 집에 찾아온 날, 그의 부인이 된다. 이렇듯 영화 속 결혼은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아드님 직업이 좋네요.”, “누르 옆에 앉아.”, “청혼을 허락해 주십시오.”로 이어지는 집안 어른들의 말이 오고 가면 부부가 된다. 남성이 지배하는 가족 집단에 통합된 여자는 두 집단이 결혼이라는 상호 합의를 통해 증여하는 제공물의 일부이다. 젊은 처녀들에게 결혼은 집단에 통합되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3] 할머니는 손녀들을 결혼시키기에 급급하다. 결혼의 순서가 다가올수록 자매들은 두려워한다. 사랑하지 않는 대상과의 결혼을 반길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영화 속 결혼 장면에서 자매들은 결혼의 주체이자 타자가 된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은 인물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그들이 행동의 실질적인 주체가 될 때는 자매끼리 있는 시간뿐이다.


영화는 다섯 자매의 이야기를 담는다. 하지만 자매들이 결혼을 하고 집을 떠나며 영화의 시점은 막내 ‘랄리’의 시점을 따라간다. 주로 핸드헬드 촬영이 사용되어 화면은 계속 흔들리고, 마치 인물들과 방 안에 함께 있는 듯한 몰입감을 준다. 또한, 관객을 영화 속 상황의 목격자로서 위치하게 하면서도 인물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독 카메라의 흔들림이 적은 쇼트들이 있다. ‘랄리’가 낮에 몰래 창문을 넘어 이스탄불을 가고자 길을 걷는 씬과 ‘랄리’가 ‘야신’에게 운전 연수를 받는 차를 보여주는 샷이다. 두 쇼트는 공통적으로 넓은 공간과 함께 인물을 보여주며 전후 씬의 긴장감과 답답함을 지운다. 이러한 개방된 세상 속 ‘랄리’의 모습은 관객에게 폐쇄된 집으로부터 대비된 공간의 해방감과 그녀를 향한 응원을 유발한다.


무스탕2.jpg


바다의 윤슬과 함께 즐거웠던 다섯 자매의 여름은 점차 생기를 잃어간다. 집의 담장과 철장은 점점 높아진다. 그러면 ‘랄리’는 창문을 넘는다. 이스탄불에 가기 위해 운전을 배우고, 더 멀리 보기 위해 지붕에 오르며,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자른다. 결국 ‘랄리’의 여름은 도망으로 끝나지만, 동시에 도전이라는 이름의 시작이 열린다.


영화 <무스탕: 랄리의 여름>은 그저 다섯 자매의 성장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아니다. 시공간을 관통해 존재하는 한 사회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시대가 변했고 사회가 달라졌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다양한 차별과 억압 속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든 ‘랄리’가 될 수 있으며, 이미 ‘랄리’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억압으로부터 도망쳐 자유를 향해 도전하자. 더 푸르를 우리의 여름을 위해.




[1]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정순, 을유문화사, 2022

[2] 위와 동일

[3] 위와 동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세계를 이해한다는 것: 생태주의와 페미니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