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 11주차 여영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여성학의 관점으로 영화를 소개한다는 것은 여성주의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영화를 청자들에게 소개하는 장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대개의 영화를 여성학이라는 새로운 사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개봉 후 약 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필자의 최애 영화이며 현 세계정세와 치밀한 의미작용을 거듭하는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소개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유대계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의 2023년 작 아우슈비츠 소장 나치 사령관 루돌프 회스를 중심으로 한 홀로코스트 영화이다.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하는 영화는 1990년대에 이르러 현재까지 무수히 많은 작품이 존재했다. 홀로코스트 사태의 비극과 참혹성을 견주어 선한 인물들을 비춤으로써 인류애를 말하는 내러티브는 전쟁 영화들의 문법과 유사하다. 철저히 선과 악을 대표하는 개인들이 명확히 구별되어 있기에 도덕적 잣대는 전쟁 범죄에 대한 반성과 역사적 책임을 묻는다. 한편, 더 통상적인 가해-피해 구도의 관계를 흐리고 이도 저도 아닌 인물들을 내세우는 내러티브도 존재한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개념에 비추어 역사 속 특정 사건에서의 잘못과 책임 지우기를 넘어 전쟁 자체의 구조적 실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재현은 어떨까. 감독은 루돌프 회스와 그의 가족들이 자행하는 악의 정당성에 대해 티끌만큼도 재고하지 않는다. 영화 내에는 가해 – 피해의 도식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것만 보았을 때 그간의 홀로코스트 영화의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일반적인 역사 재현에서 벗어난 비정상적으로 일상적인 가해자 가정의 모습을 보다 보면 이 영화가 사뭇 다른 농도의 서늘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제시할 때 그는 누구나 악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악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물의 무사유에서 비롯된다. 치밀히 의도된 악이 아닌, 생각과 공감을 포기한 수동태의 인간이 악을 행한다. 회스 가족의 일상에 대한 시각적 재현은 그 평범성을 보여준다. 이 단란한 가정의 평화는 서정적이고 지루하기까지 하다. 영화 경험에서 시각은 대다수의 관객이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감각이기에 ‘관객이 어떠한 영화적 시선에 몰입하게 되는가’는 세계의 수용에 있어서 중요한 척도로 작용한다.
나는 회스 가족의 집과 잘 꾸며진 정원을 유람하는 카메라에서 <잔느 딜망> (샹탈 아커만, 1975)에서의 주인공 잔느와 긴 침묵을 좇는 롱테이크의 시선이 떠올랐다. 시선에 의해 물상화된 여성의 노동은 잘 닦인 가구들과 함께 프레임 안에 갇혀 수납된다. 그녀는 자신의 권태를 향해 행위로써 스스로 균열을 일으키지만 곧이어 다시 피로함을 느낄 뿐이다. 한편,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카메라는 권태로운 회스 가족을 멀찍이서 ‘관람’한다. 마치 미술관의 회화 작품을 구경하듯이 수평적으로 오가는 시선에서는 그들의 균열을 구경하기 어렵다. 끔찍이 아름다운 회화의 캔버스를 맹렬히 찢고 울리는 것은 원경을 차단하는 벽조차 ‘막지 못한’ 불결한 소음들이다. 불규칙한 총격음과 풍경과 맞지 않는 기계음의 앰비언스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무시 못 할 강력한 불결함으로써, 프레임이 독점하는 시각 권력 체제에 균열을 일으킨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보여주는 시청각 위계에 대한 저항은 여성주의 영화의 구조적 전복 시도와 맞닿은 측면이 있다. 관객이 영화를 보도록 훈련받은 전통적인 방식은 근대적이고 남성주의적 시선과 결탁한다. 로라 멀비는 영화에 의해 타자화된 여성들은 단지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존재로 기능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1] 여성주의 영화는 이에 저항으로 시각 권력 중심의 사고와 내러티브를 해체하고 다른 감각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여러 형식적 시도를 탐색해오고 있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여성주의 영화의 형식적 실험들을 답습하고 독창적인 사극을 구성하여 과거의 권력 집단을 소환한다. 이 영화가 일깨워주는 감각은 시각적 재현으로 담을 수 없는 윤리적인 예민함일 것이다. 피로 일궈진 사운드스케이프는 화면 밖에서 내가 여기 존재했노라고 강렬하게 울부짖는 희생자의 목소리들을 상상하게 한다.
루돌프 회스의 구역질 이후 그가 보지 못한 어둠 너머에는 현대의 잘 닦인 아우슈비츠 역사박물관이 마련되어 있다. 다시 한번 영화는 과거에서 현재를 소환한다. 학살이 이루어졌던 현장은 여전히 피해자의 형체가 존재하지 않고, 사진과 옷과 신발 등의 사료로써 건조한 흔적 만이 남아있다. 기록들 사이를 거닐며 청소하는 노동자들을 바라보면서 일전의 회스 가족을 바라볼 때와 유사한 지루함을 느끼기 전에 우리는 영화의 시간이 짚어낸 현재에 대해 자문해야 한다. ‘역사는 왜 반복되고 있는가?’ 청산되어야 했던 인종주의와 파시즘은 오늘날 새로 운 형태로 부상하여 우리 곁을 맴돈다.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타 중동 국가 지역을 향해 자행하는 대대적인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이 진정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맞는 지 의심하게 하며, 과거에 대한 충분한 반성과 예방 조치를 취할 시간이 존재했음에도 국 제사회는 어째서 반복되는 역사를 막지 못하고 있는지 의뭉스럽다. 그렇게 텅 빈 박물관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우리 세대의 무감각함에 대한 날 선 질의를 던진다. 그러나 그 질의는 무기력하지 않다. 몰래 사과를 숨겨둔 소녀의 저항과 영화의 격렬한 감각적 저항은 현 시제 를 살아가는 하나의 태도로서 강하게 점멸한다.
조나단 글레이저의 오스카 수상 소감을 인용하며 본 글을 마치고자 한다.
“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 우리 자신을 반영하고 대면하게 합니다. ‘그때 그들이 한 일’이 아 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보라는 의미죠. 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으로 치닫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점령에 오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희생자든 가자 지구에서 자행 중인 공격으로 인한 희생자든 모두 비인간화의 희생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참고문헌
[1] Laura Mulvey,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