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존재한다.

2025-2 2주차 <에브리 보디(Every Body)>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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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여성인가요? 아니면 남성인가요?
음음, 그렇군요!! 그럼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뭔가요? 염색체가 XX, XY라서? 아니면 가지고 있는 생식기관을 근거로? 아니면 그렇게 살아와서?

그럼… 지금 지정받은, 부여받은 성별에 만족하며 살고 계시나요?

일단 전 아니라고 말씀드리며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는 여성으로 미스젠더링[1] 당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 논바이너리[2]라고 생각하는 제게 이분법적인 일상은 꽤 폭력적으로 느껴지는데요, 여러분은 성별이 남성과 여성 이렇게 두 가지라고 생각하시나요?


줄리 코헨 감독의 다큐멘터리 <Every Body>는 간성(intersex)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간성인 운동가 세 사람의 개인적인 사연을 담고 있어요. 어라… 근데 간성? 그게 뭔가요? 네, 아마 많은 분이 이 단어를 처음 접해보셨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이들의 존재를 계속 지워오고 부정해 왔으니까요.

영화에서는 "간성의 가장 포괄적인 정의는 ‘인간 성별 특성의 모든 변형’이며 천부적으로나 사춘기 때 자연적으로 발달하는 것을 포함한다."라고 정의합니다. 간성인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1.7%라고 하는데요, 이 수치면 대한민국에서 약 85만 명 정도가 간성으로 태어난다는 이야기랍니다. 생각보다 많지 않은가요? 여기서 중요한 건, "간성 특성의 존재는 우리한테 제3의 성의 가능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많은 변형이 있다는 것도 보여줍니다."[3]라는 점이에요. 생물학적으로 XX 염색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환이 있을 수 있고, XY 염색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궁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죠.


생물학조차도 이분법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믿어왔을까요?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려는 강한 시대적 흐름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성장할 때 그런 양가성이 역효과를 낳는다고 봤어요. 이성애자나 시스젠더의 정체성을 원했으니까요. 그래서 간성으로 태어난 거의 모든 아이가 자신이 간성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4]


이 영화에서는 존 머니 박사의 실험[5]을 언급합니다. 이때 머니 이론의 핵심은 "사회적 성배정을 할 수 있으며 어렸을 때 수술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어요. 이 이론은 1990년대에 이미 틀렸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지만, 실제 현장을 바꾸기까지는 아주 오래 걸립니다. 라이머의 "성공담"(실제로는 성공이 아니었지만) 때문에 다른 수많은 사람이 같은 일을 겪어야 했고, 지금도 여전히 같은 일을 겪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의학계에서는 지금까지 그런 복잡성을 대할 때 환자의 생식기 모습이나 성 정체성을 '고치는 데'만 집중했습니다."[6]

과연 무엇을 고친다는 걸까요? 어떤 사람들은 그 변형에 따라 명확하고 급박한 처치나 수술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수술이 꼭 필요하진 않습니다. 그런데도 수술은 계속되었죠. 본인의 동의도 없이 말이에요.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이루어진 수술로 그들의 자유를 빼앗아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라이머는 나중에 본인에게 그것을 바로잡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의무는 라이머가 아니라 존 머니 박사에게 있고, 사회에게 있는 게 아닐까요? 왜 피해자가 책임을 느껴야 하는 건가요?긴 시간을 침묵해야 했던 사람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왜 남성이나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는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죠?", "존재의 스펙트럼이 중요하죠."[7]라고 이야기합니다. 영화는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성별이 남성과 여성 두 가지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과연 사회의 편견이 문제가 아니라 간성인들의 존재가 문제라고 말할 수 있나요?


스위스 출신 가수 Nemo[8]의 최근 앨범의 수록곡 중 <Unexplainable>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설명할 수 없는 그래서 증명해낼 수 없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을 담은 곡이에요. 이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Where do we go when we close our eyes.” 우리가 눈을 감으면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고,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의도치 않게)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니까요. 생식기로, 염색체로, 외모로. 우리 잠시 눈을 감고 이분법에서 벗어나 보는 건 어떨까요?


간성인들이 수십 년간 침묵을 강요당하고,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자유를 빼앗기고, 자신의 몸을 설명하고 증명해야만 했던 것처럼 논바이너리인 저 역시 매일 이분법적 세계 속에서 저를 설명해야 하는 강박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노래가 말해주는 것은 우리는 설명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 글을 통해 남성과 여성을 부정하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사실 남자가 아닙니다", "여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당신이 남성이라면, 여성이라면, 그건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모두가 남성과 여성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각자 개인의 정체성을 존중했으면 하는 것이고, 그것이 전부입니다.


내가 치마를 입는 것은, 바지를 입는 것은, 네일을 화려하게 하는 것은, 화장을 진하게 하는 것은, 화장을 안 하는 것은, 머리를 기르는 것은, 머리는 짧게 자르는 것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은, 운동을 좋아하는 것은··· 이 뒤에 ‘여자이기 때문이야’ 혹은 ‘남자이기 때문이야’라는 말을 붙이기에 너무 답답하지 않은가요?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그저 개인의 선택이니까요.


눈을 감고 생각해 보세요. 염색체도, 생식기도, 사회적 기대도 없는 그곳에서, 당신은 누구인가요? 그리고 그 답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둘 다"든 "둘 다 아니든" 혹은 "모르겠다"던 그게 당신이에요.

설명할 필요 없이.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이분법에 끼워 맞추지 않아도 되는, 각자의 존재가 존중받는 세상을. 그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1] 누군가의 실제 젠더 정체성과 다른 대명사나 호칭으로 그 사람을 지칭하는 것.

[2]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젠더 범주에 속하지 않는 젠더 정체성.

[3] 영화 내용 인용.

[4] 영화 내용 인용.

[5] 데이비드 라이머에게 성별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재배정"한 실험.

[6] 영화 내용 인용.

[7] 영화 내용 인용.

[8] 범성애, 논바이너리로 커밍아웃한 가수, 자신의 논바이너리 정체성에 대한 경험을 담은 노래 <The Code>로 2024년 Eurovision Song Contest에서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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