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로 규정되지 않는 세계

2025-2 3주차 <세계의 주인>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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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계의 주인>의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고유한 정체성을 정의하는 데 얼마나 다채로운 단어를 동원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에 소속되어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지, 어떻게 말하고 어떤 모양과 소리로 웃는지, 어떤 날에 기분이 좋아지고 어떤 날에 말수가 적어지는지. 그 모든 층위가 모여 한 사람의 세계를 이루지만, 우리는 종종 그 복잡함을 감당하기보다 손쉽게 단 하나의 요소만으로 누군가를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요소 중 과거의 깊은 상처가 나를 부르는 이름이 되고, 그 이름표가 내가 살아갈 방식을 규정해 버린다면 그보다 잔인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는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마주하는 현실입니다. 윤가은 감독의 신작 <세계의 주인>은 바로 그 현실 한가운데 서 있는 고등학생 ‘주인’을 통해, 피해 이후의 삶이 어떻게 사회의 시선에 의해 다시 규정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영화 초반 쾌활하고 장난기 많은, 소위 ‘인싸’ 고등학생인 주인은 과거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힌 뒤 정체성에 대한 공격을 받기 시작합니다. 익명의 쪽지, 친구들 사이의 불안한 침묵, 주변의 시선 속에서 주인은 ‘진짜 피해자’로서의 조건을 끊임없이 요구받습니다. 이는 피해자가 ‘피해자스럽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이해받지 못하고 의심받으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입증해야만 하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뒤틀린 사회적 기대는 흔히 ‘피해자다움’이라는 용어로 불립니다. ‘피해자다움’은 사회가 공감할 만한 ‘이상적 피해자상’을 강요하며, 그 틀에서 벗어난 존재를 의심하거나 배제하는 규범입니다. 이 개념을 처음 제시한 범죄 정책 연구자 닐스 크리스티(Nils Christie)는 ‘이상적 피해자(ideal victim)’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가 특정한 조건을 갖춘 사람만을 진정한 피해자로 인정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피해자가 약할수록, 도덕적으로 선한 일을 하고 있었을수록, 위험을 피하려 했던 노력이 명확할수록, 가해자와의 관계가 멀수록, 그리고 가해자가 힘 있고 악할수록 피해자는 ‘이상적 피해자’로 간주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우리 사회는 순수하고 무력하며 도덕적으로 무결한 피해자에게만 피해자로서 공감받을 자격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영화 <세계의 주인>에서 주인이 겪는 시선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피해자 미도의 재판 과정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 장면에서 변호사는 미도가 가해자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해자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진술이 완벽히 일관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심지어 피해 이후에 밝게 웃고 일상을 이어갔다는 이유로 그녀의 피해자성을 의심하며 몰아붙입니다. 마치 “너는 왜 충분히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갔느냐”라고 묻는 듯이 말이죠. 이런 2차 가해 속에서 피해자는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을 반강제로 되풀이해 재현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정당화해야 합니다. 영화는 이런 장면을 통해 우리 사회가 합의해 온 ‘피해자다움’의 기준이 피해자에게 재차 심리적 고통과 혼란을 안겨줄 뿐 아니라, 법적 정의의 실현마저 가로막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성범죄 피해자를 공격하려는 이들뿐 아니라 보호하려는 이들 역시 의도치 않게 종종 저지르곤 하는 실수입니다. 영화 속에서 성범죄 가해자를 규탄하는 서명운동을 주도하던 수호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피해자에게 공감하고 연대하려는 과정에서 성범죄의 끔찍함을 강조하고자 ‘평생의 트라우마’, ‘씻을 수 없는 상처’, '영혼과 삶을 완전히 파괴’와 같은 극단적인 워딩을 취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무궁무진한 회복의 가능성을 지닌 피해자의 여생을 ‘비참한 피해자의 삶’이라는 한정적인 프레임 안에 가두고, 피해자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스스로의 가능성을 단정 짓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이 또한 은연중에 ‘피해자는 행복할 수 없다’는 전제를 강화하는 또 다른 형태의 ‘피해자다움’ 규범입니다. 최악의 경우, 피해자가 이러한 낙인을 피하기 위해 피해 사실 공개를 꺼려 범죄가 은폐되거나, 회복 의지를 잃고 삶을 비관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 영화가 유독 빛나는 이유는 이와 같은 ‘피해자다움’의 유해함을 말하는 데에 있어서 익숙하고 상투적인 연출 방식에 기대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감독은 주인이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요소들을 세심하게 보여주는데 초반부의 대부분을 할애합니다. 그렇게 관객은 처음엔 주변인의 시선으로 주인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작스럽게 그녀의 피해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스스로 편견에서 자유롭다고 믿는 관객조차도 미묘한 이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주인의 친구들이 그녀를 예전처럼 대하기 어색하다고 말하듯이 말입니다. 이는 영화가 열거하는 ‘주인다운 주인’의 모습이 우리가 사회와 미디어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학습해 온 ‘피해자다운 피해자’의 이미지와는 대척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충돌의 순간을 통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시선이 이미 사회적 프레이밍 속에 놓여있음을 자각하게 하고, 피해자성을 규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얼마나 공허한 일인지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합니다.


그 연출적 태도는 영화의 다른 지점에서도 이어집니다. 성범죄를 소재로 한 다른 영화들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 의도적으로 생략된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성범죄 장면의 묘사입니다. 이는 피해자를 배려한 세심한 선택이기도 하면서,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세계의 주인〉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피해의 구체적인 정도 및 방식이나 가해자의 악랄함이 아니라, 한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며 그 아이가 품은 세계를 다정하게 들여다보는 과정 그 자체이니까요. 그래서 이 영화는 더욱 소중합니다. 성범죄를 소재로만 소비하거나 윤리의식이 결여된 관습적 연출을 답습하는 대신, 윤가은 감독 특유의 따듯한 시선으로 인물의 내면을 포착하며 영화적 가치를 확장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계의 주인〉에서 상처는 주인의 세계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주인을 진정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세계 안에서 여전히 웃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그녀만의 방식입니다. 영화는 상처의 자리 위에서도 여전히 피어나는 삶의 온기를 보여주며 그럼에도 존재하는 긍정적 회복 가능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주인은 마침내 스스로의 온전한 세계의 주인(主人)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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