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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작했던 취미_둘, 뛰기운동

홀로서기를 위한 동적인 취미 기둥의 하나, 운동

by 나힐데

몸이 아픈가? 뛰어라!, 마음이 아픈가? 뛰어라!, 에너지가 없는가? 뛰어라!

특별한 준비가 없이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뛰는 것이다. 뛸 공간이, 시간이 없다는 핑계만 있을 뿐이다. 필자가 말했듯 그냥 뛰거나 걷는 것은 취미는 될 수가 없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취미’를 정의했을 때 경제적인 투자는 물론 일정한 시간을 들여 ‘자기만의 것’이 만들어졌을 때 취미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떤 운동을 취미로 만들기 전에 몸의 에너지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때 뛰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뛴다는 것은 스스로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몸이나 마음이 아플 때 뛰는 것은 최소한 살아 있음에 대한 자기 증명인 것이다. 좀 더 효과적으로 뛰기 위한 자기만의 장치를 마련하면 좋겠다. 요즘에는 앱이 있어서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좋지만 다이어리에 연계해서 다른 활동과 함께 기록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그러한 물리적인 기록을 통해서 활동한 시간에 대한 몸과 마음이 공유함으로써 유기적인 일체화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 또 보이는 것은 성취감을 더 느낄 수 있어 동기부여도 되니까 말이다.


뛰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한 편이라 활동량이 적었다고 한다. 그녀의 말로는 한 번도 뛰어 본 적이 없었으며, 최근에 두 발이 공중에 떠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느끼며 뛴다는 것을 실감했단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 ‘아! 그럴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그렇지만 극히 드물지만 그들은 뛸 수 있는 사람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뛸 수 있는데 뛰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방치다. 뛰어서 만든 에너지로 취미가 될 수 있는 운동을 개발하는 것이 후순이다. 그리고 뛰는 것이 취미인 사람들도 있다. 마라톤을 즐기는 수많은 사람들은 혼자 뛰다가 함께 뛰면서 대회에도 참가하는 등 공동체적 일상을 만들어 간다.


몸을 움직여 흠뻑 땀을 흘리고 나면 몸은 더 가벼워지고 정신은 더 맑아진다.

필자는 누구나 보면 건강한 이미지이다. 그렇지만 이런 나도 한 때는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이라는 축에 끼어 있었다. 누군가는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았다고 하니까 “좋아는 했지만 살다 언제 죽을지 몰라 프러포즈를 할 수가 없었다”나?. 스무 살부터 간에 이상이 생겼다. 아버지도 간경화로 돌아가셨으니 집안 내력이었다. 그때부터 10여 년을 식이요법을 시작했다. 몸에 통증이 오면 바늘을 때론 면도칼 날을 불에 달구어 10개의 손가락 끝을 따서 피를 흐르게 했다. 이러한 행동은 본능이었다. 손가락의 통증으로 몸의 통증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다 어느 날 자다가 일어나 동네를 뛰기 시작했다. 뛰는 움직임으로 몸에 통증을 느낄 수 없도록 말이다. 그렇게 몸을 움직여 흠뻑 땀을 흘리고 나면 몸은 더 가벼워지고 정신은 더 맑아졌다.


일이나 사람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사회 활동을 하면서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누구나 갖고 있어 오죽하면 스트레스는 관리 대상이라는 말까지 하겠는가! 그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 돈을 들여 상담을 받는다. 상담받는 과정에서 모두가 효과를 보지는 않는다. 어느 작가가 말했듯 10여 년을 10여 명의 정신분석가를 만났지만 결국 심리치료에 대한 답은 내면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서 빛이 보였다고 한다. 이는 몸과 정신 그리고 마음을 개별적인 접근대상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가장 큰 착오가 있지 않나 한다. 몸과 정신, 마음은 상호 긴밀한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 있어 개별적인 접근대상이 아니라,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말이다. 해서 몸의 활동을 통해 물리적인 에너지를 만들어 마음과 정신에 바른 기가 서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운동을 통해 자신의 기를 바꾸는 것은 타고난 기질을 바꾸는 것과 같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만의 기를 가지고 있다. 그 기의 흐름은 운동을 통해서 바꿀 수 있다. 그 말인즉 자신이 태어난 날에 대해 내재해 있는 우주의 기운을 바꿈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들 들어 알고 있다. ‘세상을 바꾸고자 했는데, 지역사회를 바꾸고자 했는데 안되더라, 해서 가정을 바꾸고자 했는데 그도 안되더라,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바꾸는 것이더라’라는 이야기가 시사하는 것은 바뀌지 않은 외부의 환경을 탓해야 변하지 않는다. 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 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변화하는 자신을 통해 주변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솔선수범의 힘을 말이다.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본 사람이 있으니 누군가 한 사람은 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뛰어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뛰어서 나를 바꾸지 않고 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내재한 나의 본성을. 나는 뛰면서 삶의 고비고비를 넘어왔다. 그리고 결국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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