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타인을 위한 기도
‘세상을 너무 일찍 알지 않았더라면, 배 고품을 너무 일찍 알지 않았더라면 그림을 그렸을게다 나는!’ 하지만 그도 아닌 것 같다 이제는. 지금도 그렇지만 유독 그때는 태평하게 갖은 게 많던지,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만이지 하고 싶은 욕망이 크던지 했던 사람들이나 범접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또, 흡사 여자라 함은 고로 좋은 대학에 가야 훌륭한 남자를 만날 수 있고, 그런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는 필요조건을 갖추기 위한 과정으로 그리는 것이 그림이라고 치부하기엔 편협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인식하고 있는 ‘그림 그리는 여자’에 대한 개념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아마도 그림을 시작할 때 많이 망설여졌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처럼 하고 싶은 대로 시간을 운용하며 살아가는 환경에서 내가 그림 그리기를 뒷전으로 두고 있으니, 모든 것에 관심이 많고 직접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때문일까? 아니면 채워지지 않은 욕구에 대한 보상? 일단 지금은 이는 마음에 따라 움직이기로 하면서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기고 있다 모든 것의 연속성 속에서 결국은 하나를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하면서.
좋은 글쓰기의 한 방편으로 그림 그리기
그림을 시작할 때도 가까이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고, 그럼에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한 방편 중에 그림만큼 좋은 것이 없다던 글 선생의 수업 중 내용이었다. 글쓰기 7년 차 정도 되니 글쓰기에 욕심이 생겼고, 그림을 그리기 위한 디테일한 관찰력은 그 과정만으로도 좋은 글감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삶에 장착된 그리움은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도록 했었지 않을까 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동기에 대해서는 나만의 이유이고, 직접 그리던 보든 간에 그림은 삶을 조금 더 풍요롭게 해 준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림 시작하기 전 마음부터 다잡기
먼저 그림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잡자 그림 배울 곳을 찾기 시작했다. 가까운 미술 학원엘 갔더니 입시미술을 하지 일반인을 상대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이야 그림 그리기 위해서 인터넷 온라인을 통해 유튜브며, 블로그며 다양한 통로로 접할 수 있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쉽지 않았다. 재료도 온라인은 물론 동네 대형마트에 가면 저렴한 가격에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고 말이다. 해서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평생교육기관에 등록하고 4B 연필 한 자루와 도화지 한 장 가지고 첫 수업에 참여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많은 고민과 망설임 없이 시작하면 될 것을 그때는 두려웠던 것 같다. ‘나도 할 수 있을까?’와 ‘그림’하면 돈이 많이 든다는데 경제적인 부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그즈음 ‘복지’ 제도가 개선되면서 명목으로 지급하는 수당이 생겨서 그 수당만큼은 자기 계발에 사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나만의 커리큘럼
그리고자 하는 그림의 장르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생각은 없었다. 일단 데생부터 시작했는데, 그것은 돈이 많이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본능적인 선택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한 분기가 끝나자, 두 번째 분기엔 수채화 붓을 들었다. 세 번째 분기가 넘어가는 시점이 되자 장르를 확장해야겠다는 생각에 한국화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 수채화와 한국화(민화라고 하지만 나의 선생은 꼭 한국채색화라고 하셨다)를 그리면서 전공은 아니지만 나만의 그림에 대한 정체성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보니 그때부터 나는 ‘나만의 커리큘럼’을 만들면서 그림 그리기를 확장하고 있었다. 첫 한국화 작품을 시작했을 때 내가 주제를 정하자 지도 선생은 거북스러워했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거라며, 그러다 그림을 포기할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입고출신으로 정체성 갖기
평생교육기관에서 그리기 1년이 지날 때 즈음, 상급기관에 파견가게 되어 그림교실에서 중도하차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림 그리기는 중단하지 않고 그리는 장소를 집으로 옮겼다. 그러면서 그림에 관련된 필요한 책들을 한 권, 두 권 찾아 읽고, 온라인을 통해 꾸준히 자료를 수집하며, 우리 그림을 알기 위한 공부를 계속했다. 무엇보다 한국채색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똑같은 필압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 필력을 키워야 하는데 고민하다가 서예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기관에서 배운 것은 장지에 모사한 그림 몇 장이었고, 자기 그림이라야 꽃을 소재로 그리는 것으로 미술 도구의 사용법에 대한 이해와 훈련이었지 싶다. 그러다 보니 몇 년이 지나자 그림에 대한 정체기가 왔다. 그때 접했던 책이 ‘완당 평전(유흥준 저)’이었다. 금석문의 대가이며 추사체로 조선에서보다는 중국에서 더 유명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이야기와 책 말미에 ‘입고출신’이라는 명제가 가슴에 박혀, 장지가 아닌 한지에 옛 그림을 모사하여 그리고 배접 하는 과정까지 혼자 습득하는 훈련의 시간을 가졌다.
사라진 우리 미술사, 우리 그림은 행위예술로 완성
우리 그림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림은 결국 살아 있는 사람이 함께 해야 완성된다는 것을 일월오봉도를 그리고야 알게 되었다. ’ 행위예술‘ 자체가 우리 그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그림에 대한 호기심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서양미술사가 그러하듯 이 땅의 인류사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우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는 과정에 한국엔 미술사가 없는가? 의문이 들었고 옛 그림을 보면서 왜? 우리 그림을 터부시 하는 풍조가 생겼을까? 우리 그림을 서민들이 베껴 그리는 그림 정도로만 알면서 하대하는지? 한국채색화(민화)를 한다면 쉬운 베껴 그리는 그림 정도로 생각해 버리는 것에 속상했다.
- 사실 정식 회화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천시받던 우리 그림에 ‘민화’라 명명한 것도 일본인 학자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이고…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민화 애호가들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조자용은 서민은 물론 도화서 화원을 비롯해 다양한 계층과 신분의 사람들의 그림으로 민화를 이해했고, 김 호연숲#은 민족의 미의식과 정감이 표현된 겨레 그림으로 정의했다. 이우환주은 평민, 서민의 습관화된 대중적인 그 림으로, 그리고 김철순은 벽사 진경의 염원, 신앙과 생활 주변을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마음을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나타낸 전통 사회의 산물이라고…(출처: ‘민화 그리기’, 나정태, 대원사)
결국 일제강점기 36년,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의해 지워지거나 왜곡된 역사는 미술사에서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역사가 후대까지도 어떤 영향으로 우리의 발목을 잡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 당시 제도권 안에서의 통제를 통해 우리 것 지우기에 혈안이 되었을 것이며, 상대적으로 제도권 밖에 있는 불화(탱화)와 무속인들과 함께한 민화라고 부르는 화려한 꽃그림 위주는 고스란히 남아 있어 ‘무당그림’ 같다는 식으로 사람들의 인식 속에 남아 있지 않았을까? 한다. 다만 미술이라는 분야가 특정인들만 향유하여 대중화되기가 쉽지 않아서 그 의식이 바뀌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생각이다(제도권의 정통 교육을 받지 않아서 직접 자료를 찾아 비교, 분석하지는 않았음을 밝혀 둔다)
소위 그림 그린다는 사람들이 하대하는 우리 그림이 나는 좋다. 좋다 못해 알리고 싶어 서양화에 도전 중이다. 그렇다고 다른 장르의 그림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폄하할 수도 없고 말이다. 다만 서양미술은 우상숭배시하며 우리의 그림을 얕보는 것에 대응하는 것일 뿐이다.
한지의 매력
우리 그림의 매력은 미처 알지 못한 우리 그림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또 덧붙일 한 가지는 한지의 매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서 한지는 화선지(중국)가 아닌 닥나무로 만들어진 우리 종이를 말한다. 얇은 한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수채화에서 그렇듯 아이 다루듯 하지만 수채화에서 서너 번의 붓질로 그림을 완성하여 맑게 표현해 내는 반면 한지는 종이의 특질, 종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해하고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밑 작업의 손질이 추가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대신 해가 갈수록 그림을 볼 때 ‘내가 이렇게 표현했었나?’, ‘내가 과연 이 그림을 직접 그렸단 말인가?’ 할 정도도 세월과 함께 늘 새로운 그림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참고로 우리의 한지는 가구나 가방까지도 만들어 사용할 정도로 그 용처가 다양하다.
견오백지천년
취미로 그리는 그림이라도 보존성을 두고는 ’ 견오백지천년‘이라는 말이 있다. 비단은 오백 년, 종이(한지)는 천년이라는 말로 그만큼 보존성을 유지할 수 있으니 웬만큼만 보존하면 늘 새로운 상태에서 그러면서 옛것의 향취도 음미할 수 있은 장점이 있다. 또한 순지 그림의 경우 동시다발로 다작을 준비하기에도 부피나 무게 측면에서 차지하는 공간에 대한 효율적 관리가 용이하다는 것이다.
그리는 행위는 또 다른 나눔
처음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 목표는, 주단가계에서 예단에 사용하는 채색화 병풍이 2천만 원은 한다는 소리에, 10여 년 후 아이들이 성장해서 결혼할 때 예단으로 직접 그린 8폭 병풍을 넣어 주는 것이었는데, 요즘은 결혼 풍속도 추세가 큰 것을 싫어라 하고 너무 고풍스러움에 특히 8폭 병풍은 뜨악해하는지라 두 폭 가리개로 수정했다. 내가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한 두 번째는 보고 싶은 그림 직접 그려 걸어 놓고 여럿이 함께 즐기는 것이다. 억지랄지 모르지만 공간에 대한 공유 하듯 볼거리에 대한 공유를 통해 각박한 세상살이에 나눔의 한 방식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타인을 위한 기도(2018년 sns 글)
기도는 할 수 있는 것의 마지막이다.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음을 알았을 때 새벽기도를 다녔었다. 그 아이를 위해 기도 하는 중 아들 주변 미워했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었다. 그리고 나에게 상처 주었던 그들을 용서했고 그들이 진정 잘 살기를 바라는 기도까지 하게 되었다.
세상은 특별히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아가면 되는 무미건조한 회색 빛이었다. 딱히 기쁨도, 슬픔도 없는 그리고 살아만 가는 것이었다. 누군가 아프다는 말에 가슴 아린 것은 회복이었다 인간, 생명에 대한. 또한 나 스스로가 살아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사람, 그렇지만 동료의 소중한 사람을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얼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다 보니 기도뿐이다. “집에 들어가면 온통 우중충해 죽겠어요. 환하게 웃을 수 있게 이쁜 그림 한 장 그려주세요” 평소 사양지심 일환인 동료의 심정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도 가리개를 뽑아 놓고, 모사하는 도중 수 없는 붓질 속에 동료와 동료의 엄마를 떠 올렸다. 먹선으로 본을 떠 놓고 한참 멍해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한창 잘 나가던 진도가 멈추더니 한 일주일을 외면한 때도 있었다. 두 폭의 그림 위에 내 마음 차곡차곡 쌓아 기도했었다. 나에게 그림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