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고 싶었던 기억이 추억이 될 때
오래된 이야기가 추억이 되면 두고두고 회자되면서 생활에 찌든 삶의 언저리에서 인간의 본성을 회복시켜 준다. 잊힌 기억을 찾아내는 것은 ‘나에게로 가는 길’의 열쇠이기도 하다. 엄마(아버지)가 먹먹한 존재인 것은 그들의 희생 속에서 자식들은 성장하고 스스로 그 위치에 가서 온몸과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형태든 ‘희생’이 내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희생’을 했다가 아니라, 스스로는 하염없이 부족해서 미안한 ‘마음’ 일뿐이지만, 자식들이 인정하는 ‘희생’ 말이다. 나의 엄마와 내가 다른 이유는 그것이었다.
2012년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큰 사촌 오빠네 집 좁은 거실과 부엌 구분 없이 짐들과 사람들이 빼곡하다. 좁은 안방엔 작은 상을 둘러싸고 큰엄마는 장롱에 기대어 앉아 있고, 사촌 오빠들은 추석 음식을 안주 삼아 술 한 배가 돌고 전화벨이 울린다.
“주소 불려줄팅께, 다 와서 전화해라 잉, 많이 변해갔고 잘 못 찾아와야!”
“지금 온데요? 추석이라고 인사 오는가 보네, 얼마만이지? 아이들 데리고 얼마나 고생했으까?!”
큰 사촌 오빠와 올케의 말에 이어 큰엄마 항심은
“그랑게 고생 많이 했응께 잘 살아야 헌디 말이다. 가락리 선착장에서 머시마들 둘 데리고 나간 것이 한 8년 되것따. 말없이 떴응께 이말 저말 많이들 하드라 마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야” 눈시울을 붉히며 한 마디 덧붙였다.
“세상 불공평하제, 어렸을 때부터 편한년은 난중까지 편하고, 고생한 것은 끝까지 고생한다니까”
춘미의 말에 큰엄마는
“그래도 우리 집안에서 민서기 되얐응께 제일 잘 되았시야, 그 가시나가 면서기 되야서 신이면에 왔을 때 느그 아부지가 얼매나 좋아했는지 면에까지 같이 갔응께. 아들 셋 봤을 때는 하나는 장군도 되고, 하나는 민서기라도 되얐으면 했응께. 그란디 시상이 뜻대로 되냐?, 조카딸이라도 민서기 되얐응께 느그 아부지가 원 풀었다고 했시야”
그러자 사촌올케는 부엌과 방의 경계에 앉아 있는 아들에게
“빈아 이따 자야 고모 오면 공무원시험 준비 하는 거 자세히 물어봐라~”
큰엄마를 찾는 길에 자야는 만 가지 감정이 들쑥거 린다. 날씨나 도로의 사정은 그저 풍경일 뿐이다. 뒷좌석에 누워 게임을 하던 둘째 원인 그 와중에 자야에게 도전장 같은 말을 한다.
“엄마가 조금씩만 먹었어야지 많이 먹으니까 외할머니가 그 큰 할머니한테 보낸 거 아니겠냐고. 삼촌이야 아들이라 그러고, 내가 보니까 엄마하고 이모들 중에 엄마가 제일 많이 먹어, 그래서 덩치가 젤 좋아 젤!”
하기야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기도 했다.
그 옛날 구로 5 공단을 지나 들어서는 가리봉거리는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가산디지털단지로 탈바꿈했고, 큰 도로가 생겨 도로 주변으로 밀려난 들쑥날쑥한 상가 건물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골목을 몇 번 돌았지만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헤매다 여러 갈래의 골목길 중에서 제일 멀리 있는 좁은 골목길에서 파란 츄리닝의 막내 사촌오빠가 슬리퍼를 끌고 손 사례를 치며 걸어왔다.
“여기여야~!”
막내 사촌 오빠를 앞세우고 한참 따라가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오빠네 이사 했구나~, 그런데 이 안쪽으로는 하나도 안 변했네, 옛날 구로공단 다닐 때 하고 똑같아!”
“여긴 주인집이고 형네는 옆에 붙은 다세대에 살지”
그제야 자야는 대문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복도식으로 되어 있는 다세대 건물 네 번째 맨 막다른 곳이 문이 열려 있고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시상에 잘 살았냐?, 큰 놈도 무탈하지야?”
큰 엄마는 없는 자야 큰 아들 안부부터 물었다.
“오늘, 우리가 최고 부자가 된 거 같다. 자야도 왔응께!”
큰 사촌 오빠는 술이 얼큰해서 해맑은 얼굴로 말을 건넸다.
“오빤 옛날에도 부자였어요~, 마음 크기로는 우리 큰오빠 따라갈 사람 없제! 오빠들 따라 칡 캐러 다녔던 거 자주 생각나, 오빠는 지금도 옷 목덜미 입으로 물고 다녀?” 자야가 말을 꺼내자 사촌 큰오빠는 그 옛날 마냥 옷깃을 물고 여러움을 감추느라 배시시 웃어 보였다. 모두들 한바탕 웃음의 도가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