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렸던 기억 저편

그렇지만 유년 추억의 한 자락이 주는 희망

by 나힐데

사람은 망각하기에 살 수 있다고 했던가! 그렇지만 그 망각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무의식의 주도권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어떤 관계에선 갈등을 일으킨다. 그 원인을 눈치챘을 때 더 헤집고 들어가 무의식의 기제를 파악해야 한다. 제대로 자리매김이 안된 서열경쟁, 어쩌면 가족관계 속에서 치열하게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무뎌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은 다음 단계인 사회구성원으로 발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가족 구성원에서부터 배제(결코 다른 가족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되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 곱씹어봤을 때, 자야는 이미 너무 많이 멀어진 상태였다. 왜곡된 가족관계에서의 회복이란 가족 구성원이 각자의 입장에서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더 많이 필요했지만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진 일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프다고 외치는데 각자의 이해만큼만 받아들이는 가족들은 더 이상 위안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자야는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진도에서의 80년대 초 초등시절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초등 전 신의도에서의 생활은 그녀에게 무의식 저편의 한 가닥 잡고 싶은 희망이 있었던 걸까? 다음 날 데리러 온다며 걸어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말이다 기다림으로. 구로공단 생활을 하면서 쓴 일기를 채운 것은 그날그날 생산량도 있었지만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았다.


신의면 가락리의 큰 엄마 집, 3평이 채 되지 않는 안방에는 부엌과 안방 벽 사이 초꽂이불이 켜졌다. 벽 사이에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유리로 가려져 있어 불 하나로 안방과 부엌을 다 밝혔다. 아랫묵 위로 옷들이 걸려 있고 그 위로 하얀 광목 보자기가 쳐져 있었고, 윗목에는 시렁이 있고 이불 두 채가 올려져 있었다. 아랫목에서 큰아부지와 큰엄마는 하품을 하면서 새끼를 꼬고, 자야는 속옷을 벗어 옷 시침 사이 이(벼룩 같은 곤충)를 잡곤 했다. 사촌 언니와 동생은 머리를 새알리면서 이를 잡다가 서케를 끌 거 낼 때면 머리카락이 당겨

“아앗”을 연신 했다.

사촌 막내 여동생은 손이 닿지 않는 데가 가렵다고 짜증을 냈고, 그럴 때면 자야는 사촌 막내 여동생의 등을 긁어 줬다. 한 겨울밤에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큰아버지는 밤마실 나가는 사촌 오빠들에게

“저것들은 밤마다 무신 마실을 저렇게 댕기까? 몸땡이는 장대만 해서 와서 새끼나 꼬랑게 말을 안 듣고”

혼잣말이듯 하면서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었다. 그러자 밖에선 다른 인기척과 함께 동네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땅꼬아제 기시요? 저 영자 어멈이여라우!”

“문 열어 드려라. 어여 들어오드라고! 무슨 일인가?”

동네사람은 밀가루 포대로 감싼 네모난 것을 내밀며

“김 한 톳 드릴라고 왔시라우. 지난봄에 쟁기질 잘해줘서 풍년이 아니였소! 내년에도 우리 논에 쟁기질 부탁 좀 할라고라우”

“공짜로 해 준 것도 아닌디, 고맙게도 이 귀한 김을 해마다 가져 온당가!”

큰 엄마 박항심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또 밖에서 동네 아짐이 들어오면서

“아자씨 기시요? 저 영달이 어멈이 여라우~, 아따 영자네보다 한발 늦었구만 이, 여그 조청 과서 한 단지 가져왔구만이라우, 내년 쟁기질 미리 부탁할 라고라우”

“아따 그라지 마랑께, 그라믄 이거라도 가지고 가더라고 고구마 절강한건디 이상 맛있게 말랐당께”

큰 엄마의 사양지심과 선심에 큰아부지는 연신 허허 웃으면서 절강한 고구마를 먹으면서 세상사 만족했다.


큰아부지는 키가 작으셔서 쟁기를 잡으시면 쟁기에 딸려 가는 듯했다. 소가 조금이라도 행로에서 벗어나면

“워이~~ 이, 이 잦것이, 이리이리~ 워, 워,워~~~"

소리를 질러대는 순간 소는 정신을 차리고는 쟁기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런 큰아부지는 동네에서 쟁기질을 제일 잘하셔서 동네 쟁기질은 도맡아 놓고 하셨다. 옆집 아주머니 말로는 고랑을 깊고 깊게 흙을 되짚어 놔 다음 해 농사는 따 놓은 당상이요, 쟁기질해 놓은 논을 보면 이쁜 처자 곱게 땋아 놓은 머리 같다고 했다. 해서 한 해 농사 시작 전에 동네 사람들은 우리 큰아부지 쟁기질을 영입하려고 구정 때면 조청이나, 김을 들고 찾아오곤 했다. 큰아부지 쟁기질 덕에 우리는 일 년 중 한 열흘은 매번 김 한 장씩을 받아 행복한 밥상 앞에서 흐뭇해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