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따뜻한 유년의 기억 저편
자야는 유독 함께한 이들보다 더 자주, 많이 잊혔다가도 빛이 스쳐 지난 자리에 피어 오른 기억의 편린들로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한 기억들 속에서 자신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다만 빛바랜 사진 한 장처럼 사물의 이면에서 가끔씩 고개 내미는 기억들로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거부하지 않기로 했다. 반복되는 중단 속에서 꾸역꾸역 한 걸음씩만 내 딛기로 했다.
동네사람은 돌아가고 밤이 깊어졌다. 다음 날 새벽이 되자 자야와 사촌들은 춥기도 하고 초꽂이 불이 부셔 한 이불속에 누워 자면서 서로 이불을 당기며 이불속에서의 발길질로 신경전도 부지기수였다. 잠 중의 짜증은 부엌에서 달그달 거리는 소리도 거들었다. 큰엄마는 안방에서 비치는 초꽃이 불로 훤하게 밝혀진 부엌에서 아침 준비에 부산했다.
쇠솥이 있는 안방 아궁이에는 장작을 넣어 쇠죽을 끓이고, 작은 양은솥이 걸쳐 있는 작은 방 아궁이에서는 밥 하는 불 조절을 위해 비땅으로 불에 타고 있는 나무를 이리저리 젖다가, 양은솥 안에 봇쌀 위로 보글보글 거품이 일면 씻어 놓은 쌀 한 줌을 밥솥에서 올라오는 김 사이로 조심스럽게 얹어 아궁이 불을 한번 더 지펴서 뜸을 들였다. 마지막 아궁이 끝 불에는 전날 저녁에 영자어멈이 가지고 온 김을 가족 이름을 부르며 수대로 굽는데 그야말로 멀티였다.
방 한가운데 네모난 작은 상을 두고 큰아부지와 사촌 오빠 둘 앉고, 부엌 쪽으로 방바닥에 김치 한 사발과 간장종지를 사이에 두고 큰엄마와 사촌언니 동생이 앉아 있었다. 큰 엄마는 김 한 장씩을 나눠줬다.
“느그 아부지 쟁기질이 근동에서는 소문이 났시야. 그랑게 이 귀한 김을 먹을 수 있제”
큰 엄마의 그 말에 큰 아부지는 흐뭇해하시며 허허 웃으셨다. 그리고는 당신 밥그릇에 있는 쌀이 섞인 밥 한술을 떠서 자야 밥그릇에 올려줬다. 큰 엄마는 솥에서 밥을 뜰 때면, 뜸 들일 때 얹은 쌀밥은 오롯이 큰 아버지 밥으로 뜨고, 쌀과 보리가 적당하게 섞게 해서 오빠들 밥을 뜨고는 보리밥은 큰엄마 자신과 딸들 차지였다.
모두는 김을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어 밥숟가락 수에 맞춰 아껴 먹었다. 갑자기 막내 사촌 여동생이 훌쩍이는데, 상 위에서 밥을 먹던 막내 사촌오빠가 조각 김 한 장을 가져간 것이었다. 다시 달라는 말도 못 하고 울기만 하고 둘째 사촌오빠가 막내 사촌오빠 머리에 군밤을 먹이자 막내 사촌오빠도 훌쩍거렸다. 그러자 큰아부지는
“잦것들이 밥 먹다 복 달아나게 시방 머 하는 짓들이여~”
큰아부지는 오빠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은 눈이 많이 왔응께 산에 가서 등걸(죽은 나무 밑둥)이나 해 와라”
자야는 슬레이트 지붕에 파란 페인트가 칠해진 처마 아래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작은 방에서 오빠들은
“작은 짱골에 칡이 많다고 하드라, 오늘은 작은 짱골까지 가보자”
“아부지가 등걸 하라고 했는디, 작은 짱골까지 가서 칡을 캐면 등걸 할 시간이 없제”
“콱 그라믄 니가 등걸해 오든지, 나는 작은 짱골로 갈랑께”
자야는 마당어귀로 나가 작은 짱골 가는 길목 담벼락에 숨었다. 치칸 담벼락 길에서 작은 짱 골 가는 길에 숨어 있던 자야는 망태를 매고 등걸 하러 나가는 오빠 뒤를 몰래 따라갔다. 질퍽한 길에서 자야의 신발은 자꾸 미끄러져 철퍼덕거렸다. 마을을 벗어나 어지레밭을 지났을 때 오빠들은 뒤 따라오는 자야를 보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손사래를 했다. 뒷산 재에 다다르자 오빠들은 쉬면서 마을을 내려다 보고는 그때까지 따라오고 있는 자야를 발견했다. 막내 사촌오빠는 주변에 있는 칡넝쿨을 낫으로 베어서 바윗돌 위에 올려놓고 낫 등거리로 칡넝쿨 줄기를 자근자근 빻았다. 칡넝쿨이 부드러워지자 자야의 신발을 이리저리 동여매 주었다.
“이렇게 하믄 안 미끄러져야!”
골짜기에 다다르자 오빠들은 바위틈 사이로 굵은 칠 넝쿨을 찾아 헤집다가 잡히면 뿌리 쪽 돌덩이를 제끼고 곡괭이질을 하다 웃통까지 벗고 조심스럽게 칡을 캐기 시작했다. 자야는 소나무를 등에 대고 앉아 칡이 다 캐질 때까지 기다렸다. 한 참 곡괭이질을 하다 막내 사촌오빠는 호주머니에서 마른 칡 한 가닥을 자야에게 건네준다. 코를 훌쩍이다 누런 코를 손등으로 훔쳤고, 옷소매에서 콧물이 말라 딱딱해진 줄 모르고 습관처럼 손 등으로 콧물을 훔치면 코 언저리가 빨갛게 되어 쓰라렸다. 굵고 큰 찰 칡을 캔 날은 큰아부지한테 욕은 먹지 않았다.
낮에 사촌 오빠들이 캔 칡을 씹으며 초꽂이불 아래에서 큰 아버지와 우덜은 새끼를 꼬고 큰 엄마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 자야와 사촌 동생들은 칡을 서로 많이 먹으려고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느그들 칡 때문에 쌈박질하믄 이야기 안 해 준다! 오늘은 무신야그 해주까?”
“방구쟁이 할아버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끼를 꼬시던 큰아부지는 방귀를 뀌었다. 모두는 깔깔대며 웃었다.
큰 엄마는 깎은 무를 한 입 베어 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 번은 윗집 영감이 방귀를 뀌었는데 얼마나 힘이 셌는지 아랫집 구들장이 뜯겨 나갔다고 안 하냐?, 그라믄 아랫집 영감은 가만히 있겄냐? 윗집에 엉덩이를 들이대고 방구를 끼어대믄 윗집 처마가 들썩였다 안 하냐? 그러다가 이 영감들이 누구 방구가 센지 내기를 했는디, 방구로 산을 이 짝에서 저짝으로 옮겼다고 했응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밤이 깊어가고 자야와 사촌들은 스르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