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된 상처는 바로 어제 일처럼 그 때의 두려움

두려움으로 머물고 있던 일들을

by 나힐데

기억을 더듬어 하나씩 어루만진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아주 오래 된 일이라 그냥 웃으면서 책 한 페이지 넘기듯 하고 나면 지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봉인된 상처는 바로 어제 일처럼 그 때의 두려움이 되어 고스란히 현재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그리곤 충분해 질 때까지 어루만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두려움으로 머물고 있던 일들을 그저 옛날 이야기로 떠나 보낼 수 있다.


마루에서 굴러 떨어진 일이를 업은 자야는, 어지레밭 너머 짱골 가는 길이 이렇게 멀었는지 혼잣말을 하며 돌아서니, 큰엄마 집이 보였다. 마당에선 사촌 동생 둘이 놀고 있었다. 자야는 일이가 울며 보채자 노래를 불러줬다.

“고생혔다잉, 그란디 야가 왜 맥아리가 없다냐?”, “몰라라우, 어지레밭 지나면서부터 울었응께요”


베네아짐은 자야의 시커먼 손을 보고는 밭 가장가리 골짜기를 가르키며 언능 손 씻고 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자야에게 밭에서 골짜기로 내려가는 길은 그리 쉬운 길이 아니였다. 자야는 언덕길 밭두덩에서 넘어지지 않을려고 발을 디딘다는게 미끄러지면서 검불을 잡았는데 그대로 뽑히면서 웅덩이로 떨어졌다. 겨우 손을 씻고 완만한 경사를 찾아 밭을 돌아 나오자니 또 한참 걸렸다. 밥 한덩어리 먹고 다시 업혀주는 일이를 업고 되밟아 갔다.

그때까지 사촌 동생들은 놀고 있었다. 자야와 사촌동생들은 흙으로 밥을 짓고, 풀로 반찬을 만들어 소꿉놀이를 했다.


“이 돌이 삘간게 갈아서 풀에 문대믄 고추가루가 되것다이!”

“그라믄 언니가 엄마해!”

해는 졌는데 달이 떠서 훤한 마당에서는 늦게까지 소꿉놀이가 계속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배는 일이가 먼저 고팠는지 울며 보채기 시작했다. 자야는 큰엄마 집을 나와 일이네 집으로 갔다. 배네아짐은 부엌에서 허드렛물을 가지고 나오면서 자야와 마주쳤다. 일이는 더 울기 시작했다. 배네아짐은 자야 등에서 일이를 뽑아 들면서


“워따 시방까지 머하고 이제 오냐, 싸게싸게 와서 애기 젓먹이제”

자야는 배네 아짐이 버릴려고 가지고 나온 허드렛물을 들어다 돼지우리 밥통에 부었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불 지펴지는 아궁이 앞에 앉아 비땅질을 했다. 배네아짐 집 안방에서는 네모난 상 하나에 일이 아버지와 배네 아짐 그리고 자야가 앉아 밥을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가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워쩨 아그가 이상한것 같은디? 경기를 하는 거 아녀?”

“그랑게 낮에 젓 물릴 때부터 이상했고만이라우, 워쩨 갑자기 그러는지, 자야야 혹시 집에서 무슨 일 있었던것은 아니제? 아무렇지 않던 아그가 왜 갑자기 이렇게 우는지 모르것다잉!”


자야는 화들짝 놀라며 모른다고 손사례를 쳤다. 낮에 일이가 마루에서 굴러 떨어진 것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일이가 아무 일 없이 울지 않고 젓 잘 묵고 잘 자기만을 바랬다. 자야는 자다가도 일이가 울면 먼저 경기가 날 정도로 일이의 울음 소리가 무서웠다.


다음 날 아침 큰엄마 집 마당 한 가운데에서는 새끼줄로 묶인 키(곡식 알곡을 고르기 위해 쓰던 기구)로 참새잡이를 하고 있었다. 줄 끝은 안방에서 엎드려 마당을 내다보고 있는 자야와 사촌 동생이 잡고 있다.


“참새가 온다. 잡아 당겨야”

“아따 조용허고 기다려야, 키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갔을 때 잡아당겨야 항께”

“지금 잡아 당기라고!” 하면서 막내 사촌동생이 줄을 확 잡아채자 참새가 날아가 버렸다.

“내가 기다리라고 했제잉? 봐라봐라 날아가부냐~”

자야는 마당으로 나가 키를 다시 새우고 돌아와 엎드렸다.

“근디 언니는 워째 오늘은 일이 안 업고 있어?”

“으응 배네 아짐이 데리고 목포 갔시야!”

“그라믄 오늘은 우리랑 같이 자는거여?”

“으응”

저녁이 되자 자야는 부엌 밖에 있는 아궁이 솥에 보리쌀을 씻어 앉히고 불을 지폈다. 솥에서 김이 모락거리자 비땅으로 이지저리 저어 불을 죽이고 보리쌀을 초벌 삶았다. 큰 엄마는 밭일을 하고 들어와서는 허리춤에 달린 라디오(밧데리가 큰)를 마루에 풀어 놓고는

“일이가 많이 아픈갑다. 일이 어메가 목포가믄서 빙원에 데리고 간다고 하든만”

“그랑게요.” 자야는 아무렇지 않는 듯 말했지만 심장은 자야의 귓구멍에서 뛰기 시작했다.

“니가 봇쌀 삶아 놨냐? 워따 야무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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