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위안이 되는 것, 작은 생명
방학이 가까워지자 목포네(목포에서 왔다고 해서 그렇게들 불렀다), 자야는 목포 집으로 엄마를 보러 갈 수 있다는 설렘으로 들떠 있었다. 그런데 방학이 시작되자 이모는 이모부 눈치를 보며 “어짜긋냐, 쇠꼴에 깨밭 하고 콩밭 지심은 매고 느그 엄마한테 갔다 오니라” 했다. 콩밭 지심(잡초)을 매고 돌아서면 먼저 맨 깨밭 지심이 올라왔다. 깨밭 지심을 다 매고 나면 콩밭 지심이 또 올라왔다. 그렇게 방학 끝자락에 자야는 목포 엄마네로 갈 수 있었다.
어느 해 방학이라고 목포 엄마네 집으로 들어서자 평상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던 막내 동생이 맞이했다. 막내 동생은 어찌나 이쁘게 생겼는지, 친척들이라도 오면 안아서 벽에 거는 시늉을 하면서 인형처럼 대했다. 며칠이 지나자 막내 동생은 의아하니 자야를 이리저리 쳐다보며 “언니는 왜 우리 엄마한테 엄마라고 해?”, 삐쩍 마른 데다 까맣게 탄 자야는 하얀 언니나 동생들을 보면서 그 언젠가 엄마가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던 그러한 말들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일련의 이런 텍스트들이 자야에겐 가족의 테두리에서 서성이게 했을지도 모른다.
방학이 끝나자 엄마는 시간이 없다며 배표 한 장을 끊어주면서 버스요금으로 얼마를 손에 쥐어주고는 여객선터미널을 떠났다. 자야는 진도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진도호를 탔는데 그 배는 진도 벽파선착장으로 가는 배가 아니라 조도로 가는 배였다. 가는 도중 거쳐야 하는 선착장이 나오지 않자 자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 배는 마지막 섬에서 정박하고 다음 날 아침 되 밟아 목포로 가는 배였다.
두려움은 어둠과 함께 오는 것이라는 것을 자야는 그때 알았다. 어리지만 다시 온 곳, 목포로 돌아가는 것이 다음 여정임도 알았다. 갈 곳이 없는 자야는 뱃머리에 숨어 웅크리고 앉아 숨도 쉬지 않고 선원 모두가 배에서 내리길 기다렸다. 여름방학 끝자락이라 춥지 않아 다행이었고, 가끔은 철썩이는 파돗소리가 두려움을 없애 주기는 했지만, 어둠이 몰고 오는 두려움은 어찌할 수 없이 온몸으로 감수해야 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으면 깊은 잠에라도 빠지련만 정신은 두려움을 쫓기 위해 더욱 청명했고, 그럴수록 어둠은 온몸을 옥줘어 왔다. 그때 구원의 빛이 나타났다. 땡그르르 구르는 구슬같이, 그 빛은 소리 없이, 그리고 흔들림 없이 자야에게로 와서는 가끔씩 사라졌다가는 다시 나타났다. 자야는 그 빛이 아주 가까이 와서야 그게 쥐의 빛나는 눈동자임을 알았다. 살아 있는 존재로 동질감에 자야와 쥐는 동지가 되었다. 그렇게 쥐의 눈동자는 자야에게서 어두움을 없애줬다.
하수구를 통해 다니는 쥐, 그 쥐는 온몸으로 원죄를 풀어헤쳐 추수가 끝나면 일제히 쥐서(쥐를 잡는 것) 운동을 벌였고 90년대 초까지도 쥐꼬리는 곧 주민 소득이 되었더랬다. 전쟁이 끝나고, 기아에 허덕일 때도 페스트로 전 유럽을 강타했을 때도 쥐는 그 중심에 있었다. 원죄를 안고, 자야가 존재함으로 원죄이듯이.
자야가 살구나무에 매달려 온몸으로 그날의 죄를 감내하고 있을 때 밤을 함께 해 줬던 그 쥐는 사라졌다가, 며칠 후 황토흙과 짚으로 만들어진 부뚜막에 세워놓은 식초병 뒤에 새끼를 까 놓았다. 식초병을 들어 손가락만 한 연분홍빛의 이상한 벌레가 꿈틀거리자 징그러움과 또 미쳐 감지 못한 감정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야는 혹여 어른들이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될까 봐 모른 체 식초 댓 병을 제 자리에 놓고 돌아 섰다. 그들의 존재를 알고 더럽다기보다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손가락만 한 살색의 그것들이 꿈틀대던 잔상은 한참이 지나서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간간히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