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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라미 May 23. 2024

도피

그림책 <어서 와요, 달평씨>

‘이~~ 잉’

앗! 일요일 아침이다

남편의 아침식사를 챙기고 침대에 누워 선잠이 들었다. 청소기 소리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책상의자는 베란다로, 요가매트, 폼룰러, 화장대의자, 쓰레기통은 드레스룸으로, 나머지 바닥에 뒹구는 옷가지와 가방들은 침대 위에 던져둔다. 그리고 로봇 청소기를 작동시켰다. 온 집안을 청소하는 남편이 내 방을 보며 한숨을 쉴 것이 분명해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결혼한 지 22년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남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 많다. 예를 들면 간헐적 코골이, 방귀, 정리 안된 방. 각 방을 쓰는지라 남편이 내 방에 들어오는 날은 일요일 청소시간이 유일하다. 빠르게 대처를 하고 집을 나선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사우나로 향했지만 현재 몸이 엉망으로 불은 상태라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나는 사우나에서 몸 좋은 아줌마로 쫌 알아줬다. 하지만 출산 이후 최대 몸무게를 찍고 있는 지금 내 맨 몸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마른 몸에 대한 강박이 있다. 그리고 날씬한 몸을 과시하고 싶은 허영도 있다. 마른 몸을 유지하기 위해 7년 동안 탄수화물로 된 식사는 점심 한 끼가 유일했고 하루 두 시간 운동은 필수였다. 6개월 전 심한 우울증을 시작으로 운동도 식이도 모두 놓아 버렸고 지금은 매일 결심만 하고 있다. 실상 도피 중이다.


아파트 현관을 나오니 하늘도 바람도 다디달았다.

’아, 내가 사랑하는 무용한 것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구나.‘

내가 사는 아파트는 대단지 인 데다 조경이 잘 되어 있어 멀리 가지 않아도 산책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갖추었다. 따뜻한 햇살이 좋아 그늘을 피해 걸었다. 발걸음이 가볍다. 꽃은 흐드러지게 피었고 나무는 내가 사랑하는 연두잎을 가득 안았다. 신록의 계절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다다랐다. 내가 지은 이름이다. 나무 터널을 지나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작은 공간이 나온다. 보라색 나비 조형물이 특히 마음에 든다. 흔들의자 벤치에 잠시 앉아 눈을 감았다. 오르락내리락 흔들리는 기분이 묘하게 좋다. 하늘로 떠오르는 기분이랄까?


시계를 보니 아직 청소가 끝나지 않았을 시간이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 커피와 책이 없다니… 나의 완벽하고 행복한 도피를 위해 조용히 집으로 잠입했다. 남편은 일주일치 더치커피를 내려놓는다. 나에 대한 배려다. 이러니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텀블러에 커피를 가득 채우고 읽던 책을 들고 다시 집을 나서니 남편이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도 웃음으로 대꾸했다.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책을 펼쳤다. 커피 한 모금을 머금고 책을 읽어 내려간다. 현재 나는 천국으로 도피한 귀여운 악마다. 청소가 하기 싫어 비밀의 화원으로 도망친 검은색 악마. 하지만 세상 행복하다.

집으로 돌아가면 점심밥을 준비해야 하는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또한 즐기리라. 나는 책과 커피와 햇살아래에 도피 중이다. 봄 안에서.



<어서 와요, 달평 씨>의 출발점은

 ‘나한테도 우렁 각시가 있으면 좋겠다’는 아이 같은 바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엄마들을 향한 위로나 대리 만족이 그 도착점은 아닙니다. 따뜻한 밥, 말쑥한 옷, 편안한 잠자리, 깨끗한 화장실…… 온 가족이 당연한 듯 누리는 일상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신민재 작가는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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