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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라미 May 16. 2024

인생에 정답이 있었습니까?

그림책 <완벽한 계획이 필요한 빈칸>

손으로 글씨 쓰기를 매우 좋아한다. 펜을 꼭 쥐고 한 자 한 자 눌러쓰면 빈 공간이 채워지는 그 기분이 좋다. 요즘은 만년필의 매력에 빠져 있다. ‘서걱서걱’‘사각사각’ 펜 촉과 종이가 맡다으며 내는 거칠지만 고급진 소리?
아직도 키보드를 누르는 실력이 독수리를 조금 능가하는 수준의 나는 ‘한글과 컴퓨터’를 원망한다. 왜 이렇게 잘 만들어서 나를 무능력자로 만들었는가?

글씨 쓰기가 좋으니 메모와 필사가 취미이다.
고등학교 시절 다이어리에 일기와 학습 계획을 빼곡히 적고 하나하나 지워나갈 때의 성취감. 자아도취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일일계획, 주간계획, 월별 계획을 세세하게 업무 일지에 작성했다. 요즘은 업무 일지를 쓰지 않아 할 일들을 포스트잇에 써서 모니터 가장자리에 다닥다닥 붙인다.
나는 이토록 계획적인 인간이 되었다… 고 말하고 싶지만 그냥 쓰고 붙인다.
엉성해진 내 기억력을 보완해 주는 정도.

오래 살진 않았지만 인생이란 게 계획대로 되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 이유는 내가 게으르고 무능력해서라기보다는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변수들. 그 변수들을 통제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아니 우리 모두 없을 것이다.

한창 잘 나가던 교사였던 내가, 승진으로 가는 길에 가장 선두에 섰던 내가, 큰 병으로 모든 걸 포기해야만 했던 변수. 사표를 내고 교문을 나오면서 지금처럼 영혼까지 자유로운 프로 프리랜서가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현재의 나는 목표가 있지만 더 이상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는 않기로 했다. 하다 보면 되겠지. 쓰다 보면 늘겠지. 최대한 자유롭게.
타고난 천성이 걱정이 많은 터라 일이 잘 되지 않을 때는 한없이 땅굴을 파고 들어가지만, 또 누군가가 변수가 되어 나를 꺼내 준다는 것도 알았다.

완연한 봄이 된 4월 1일.
나는 그간 저장해 두었던 인스타의 여행정보들을 정리하고 평일 여행 일정들을 핸드폰에 차곡차곡 기록했다. 가면 좋고 아니면 말고.
다들 아시다시피 봄을 환장하게 좋아하고, 무용한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행복하다!!!

전화벨이 울린다.
“정선생님 월요일부터 학교에 나와주실 수 있나요?”
“아니요.”
“왜 그래? 의리 없이. 지금 너무 급해. 나 좀 도와주라.”
“얼마 나요?”
“한 달”

하…
이래서 계획이란 게 의미가 없다.
남은 3일을 즐기기 위해 강원도 여행정보를 펼친다.
또 어떤 변수가 나를 기다릴까?


비어 있는 시간을 선물한 그림책!

『완벽한 계획에 필요한 빈칸』은 완벽한 계획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새해 목표를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는 그림책입니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기록하는 완벽한 가족의 완벽한 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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