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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라미 May 30. 2024

뒷모습

그림책 <완두의 그림학교>

뒷모습

“왜 얼굴이 없어?”

내 그림을 보고 남동생이 별 뜻 없이 던진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 그림은 전부 여자들의 뒷모습이거나 임자 없는 드레스들이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는 좀 특이하다. 평소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은 컸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이 대학 재수를 결정하면서 분당으로, 소위 말하는 일타강사들의 현강을 들으러 다녔다. 아들이 수업을 듣는 6시간 동안 나는 할 일이 없어 분당 여기저기를 배회했다. 겨울이었던 터라 하루는 너무 추워서 모텔을 대실하고 들어간 적도 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주변 취미와 관련된 학원을 검색하다 우연히 미술학원을 발견했다. 내 마음이 혹한건 미술도구를 아무것도 챙길 필요 없이 몸만 가면 된다는 광고문구.

집으로 가서 등록 방법을 알아보고 다음 주부터 바로 화실로 갔다. 처음 시작할 때는 그림책에 넣을 그림을 그릴 요량으로 색연필화를 시작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나의 필요와는 무관하게 유화나 수채화를 캔버스에 그리는 회원들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곧바로 유화를 배우기로 하고 캔버스를 구매했다. 미리 인터넷으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골라 갔고,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에는 잼병이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나는 조금 잘한다는 자만심이 생겼다.

지금 와서 그때의 작품들을 보면 얼굴을 들기가 민망하다. 그렇게 나의 그림 그리기는 시작되었다.



아들이 집을 얻고 자취를 시작하며 2주에 한번 학원을 갈 수 있었기에 한번 가면 최소 4시간 길게는 6시간을 밥도 먹지 않고 그림만 그렸다. 역시 중간 없는 성격이 잘 드러난다.  한 번 빠지면 그것밖에 안 보인다.

그만큼 재미있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꽃이나 과일, 풍경을 그렸지만 나는 여자를 그렸다. 화실에 오시는 분들마다 내 작품을 보고 항상 누가 그리는 거냐며 묻는다고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잘 그리지도 않았고 특이할 건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른 그림.

아들의 재수가 끝나고 화실에 있는 그림들을 모두 집으로 가지고 왔다. 한쪽 벽을 그림으로 채웠더니 작은 갤러리 같았다. 나만의 만족이 컸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멀찍이서 벽 전체를 보다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 그림은 모두 여자들의 뒷모습이었다. 얼굴을 그린 작품이 없었다.

왜 나는 뒷모습만 그렸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하지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림을 계속 그리기 위해 집 가까이에 있는 미술학원을 알아보았다. 다행히 걸어서 10분 거리에 가정 미술 학원이 있었다. 젊은 원장님은 지금도 여전히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시는 분이셨다. 선생님의 그림은 자연과 인간을 조화롭게 표현한 매우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특히 내가 마음이 끌린 건 선생님은 얼굴을 그리셨다. 선생님과 그림을 그리다 보면 내가 뒷모습만 그리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과 수업 첫 시간 오랜만에 펜화를 그리고 싶어 핀터레스트를 검색해 모사할 그림을 골랐다. 역시나 뒷모습. 아직 선생님과 그리 친해지지 않아서 내 속사정을 말씀드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마음에 들었다.

내 그림을 보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혜진 님은 전체를 잘 보시는데 아직 부분 표현이 잘 안 되시네요. 손과 발이 어색해요.”

내 그림에서 어색한 부분을 살짝 손을 봐주셨는데 작은 변화에 그림이 훨씬 나아 보였다


다음 수업시간 10분 전에 화실에 도착했다. 회원들이 오기 전에 선생님과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지난 내 그림들을 보여드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혹시 앞모습을 일부러 안 그리신 건 아니에요?”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어요.”

“그럼 오늘부터 저랑 앞모습을 그려보시죠. 그리다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긴 머리 여자가 꽃을 든 그림을 골랐다. 색연필로 스케치를 하면서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사람의 이목구비를 그리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선생님께 포기를 선언했다. 선생님이 그림을 한 장 출력해 주셨다. 얼굴의 하관만 그려진 그림이었다.

“혜진 님은 전공을 하신 게 아니고, 그림을 그린 지 오래되지 않아서 인물표현이 어려울 수 있어요. 대부분 회원님들이 인물을 그리지 않는 이유가 그리기 어려워서입니다. 일단 부분 부분 배워가시지요. “


아… 나는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잘 못하는 걸 남이 보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한다. 꽃을 그리지 않은 이유도 섬세한 표현이 자신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뒷모습은 앞모습을 궁금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내 마음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남들과 좀 다른 것을 좋아하지만 쑥스러움이 많아 앞모습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마음.

그런 마음이 그림에서 표현된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제 나는 부끄러워하지만은 않는다. 잘하지 못하는 것은 감출 게 아니라 배우면 된다. 배워서 안되면 다른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것은 포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달라지고 있는 것은 어쭙잖은 자존심을 버리는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억지스러운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다고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숨지 않고 우기지 않고, 모르면 묻고 배울 것이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나를 쉽게 패배자로 만들어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 나이 50이 되어서야 나는 진짜 어른이 되는 법을, 나를 진짜로 사랑하는 법을 하나씩 배워 나간다. 항상 내 옆에 있었지만 외면했던 것들을 고개 들어 마주한다.


<완두의 그림 학교>는 자유롭게 자신의 가능성을 키워 가는 ‘꿈’과 그 꿈을 실현해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격려’에 관한 그림책입니다. 처음엔 누구나 서툴고 어렵다며 위로해 주고, 두려워 주춤할 때는 “괜찮아!”라고 격려해 주는 유쾌하고 따뜻한 응원의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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