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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라미 May 18. 2024

저를 구하소서

작은 고백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 영혼을 쫓아온다. 나는 잡히지 않으려 계속 도망치지만 끈질기다. 겨우 그를 따돌렸다. 잠시 안도하는 사이 눈앞에서 다시 굉음을 낸다. 그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소환에 응한다. 그가 한눈을 파는 사이 나는 다시 나의 세계로 달아난다. 하지만 그는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긴 시간의 사투 끝에 알람을 껐다. 10분마다 설정해 놓은 것은 좋은 방법이었다.


수면장애 환자가 잠에서 깨지 못해 알람과 사투를 벌인다니 참으로 웃픈 이야기다.

어제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녀왔다. 상담을 하는 동안 원장님의 손가락은 바삐 움직인다. 아마도 내 증상을 차트에 기록하고 약을 처방하는 중일 것이다.

나는 병원을 3주에 한 번씩 간다. 진료 전 무려 3가지의 체크리스트를 카톡으로 받아 미리 작성한다. 그 결과를 나는 해석할 수 없다. 원장님과 만나 그 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나눈다. 원장님은 체크리스트를 분석하며 현재 내 상태를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 3주 동안 내가 기억하는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 남자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다. 원장님도 같이 울었다.


집에 와서 지난달 약과 비교해 보니 두어 가지가 바뀌어 있었다.

파란색 알약 반 개. 그것이 내가 잠에서 깨어나기 힘든 이유일 런지도 모르겠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말씀드리면 들어가는 그 약을 먹고 나면 좀 힘들다. 되도록이면 먹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려 최근 두어 달은 그 약이 없었다. 원장님 보시기에 이번 내 상태가 좀 안 좋은가 보다.


나도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내 목소리가 유난히 커졌다. 그리고 작업실에 주로 머물렀고 아주중요한 일 이외에는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병원을 가야 하는데 벌써 4개월을 미루는 중이다. 미용실을 갈 때도 한참이 지난 것 같은데…

반면 학교에서 더 발고 더 씩씩하게 보이려 애썼다. 인사도 잘하고 아이들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수업을 했기에 재미있는 선생님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페르소나, 쉽게 말해 가면 우울증이다. 우울의 정도가 커질수록 크고 두꺼운 가면을 쓰고, 조증을 보인다.


내가 작업실을 좋아하는 건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래의 나와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고, 글쓰기를 하는 건 내 가면을 벗기 위한 연습이자 노력이다.

파란색 알약 반알과 알람 용병들의 쫓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지금 글을 쓴다.

아직은 극복하는 중이고 평생 극복해야 할 과제일 수 있지만 예전과 다르게 절망적이지는 않다.

나에게 뚜렷한 목표가 생겼고 스스로 선택한 하고 싶었던 일을 해 낸다면 내가 자랑스러워질 것 같다. 이번에는 실패한다 해도 왠지 좌절하지 않을 것 같다. 온전한 나의 선택이었으니.


그러니 부디 신이시여, 잠으로부터 저를 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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