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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라미 May 18. 2024

그대는 아는가? 내 마음을

사랑하지 않지만 존경하는 남편

그대는 아는가? 내 마음을

남편이 켜 놓은 텔레비전 소리가 내 주말 알람 소리다. 뽀스락뽀스락 뭔가 간식거리를 찾아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상상되어 침대에서 더는 뭉갤 수가 없다. 반쯤 감긴 눈을 비비고 일어나 곧장 주방으로 향한다. 다행인 것은 남편의 아침 식사 메뉴는 늘 정해져 있다. 밥 한 숟가락에 마른 누룽지를 넣어 끓인다. 누룽지가 끓는 동안 멸치 몇 마리에 묵은 김치를 넣어 지지고 새우젓에 양념한다. 이것이 아침 식사 준비의 전부다. 김치를 지져서 먹는 걸 시집와서 처음 먹어보곤 좀 놀랐다. 멸치 김치찌개에 국물이 없는 그런 느낌인데 누룽지 반찬으로 잘 어울린다.


원래 남편은 아침을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친정집에서 아침 식사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고 국과 반찬을 갖추어 제대로 먹었다. 엄마는 아버지께서 술을 드시고 온 다음 날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집 가까이 열리는 번개시장에서 재첩국을 사 오셨다. 번개시장은 역 뒤에서 새벽 시간 기차를 타고 온 상인들이 반짝 물건을 팔고 사라진다고 하여 번개시장이었다. 하동의 재첩국 할머니는 늘 그 한자리를 지키셨다.

이런 친정집에서 자라다 보니 아침 식사를 하지 않는 남편이 마음에 걸렸다. 수원에서 일산까지 차가 밀리지 않는 시간에 출근하려면 나는 5시부터 일어나 식사를 준비했다. 밥과 국, 그리고 두어 가지 만찬을 만들어 준비해 놓은 식탁을 보기만 하고 출근할 때면 정말 속상했다.

13살에 형을 따라 서울로 유학 나온 남편은 차려주는 이가 없으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고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 안쓰러웠다. 그래서 평생 같이 잘며 먹이는 건 잘하는 아내가 되기로 했다. 우리 엄마처럼.


이런 나를 보고 친구들은 요즘은 아침을 안 먹는 사람들이 많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꼭 아침을 하는 나로선 좀 불편했다. 혼자 아침밥을 먹는다는 것도 편치 않을 것이었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남편이 좋아하는 것들을 여쭈어보고 메뉴를 바꾸었다.

찐 감자를 좋아한다고 햇감자를 쪄 주기도 하고 누룽지를 좋아한다는 말에 아침마다 뚝배기에 밥을 해서 누룽지를 만들었다. 그때 찐 김치도 배워서 함께 내주었다.

나의 정성이 통했는지 아니면 미안해서였는지 남편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후회 중이다. 그냥 내버려 둘 걸. 결혼 22년 차가 되니 그때의 열정은 사라졌고 나도 점점 귀찮아진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 우리 집식구 중에 아침밥을 먹는 사람은 남편뿐이다. 아이들도 어린 시절엔 꼭 밥을 챙겨 먹였는데 지금은 잠이 더 좋다는 녀석들을 굳이 설득하지 않는다. 나는 간헐적 폭식을 위해 아침을 커피 한 잔으로 대신한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좀 하기 싫은 건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남편을 위해 해주는 일이 별로 없다. 세탁소에 세탁물을 맡겨주는 것 이외에는 밥을 챙겨주는 게 전부다. 이것까지 소홀히 한다면 남편이 좀 서러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름의 약속을 지키는 중이다.

내가 그를 위해 평생 해주기로 약속한 일. 내가 해줄 수 있는 일.

서울에서 홀로 지내며 바깥 음식을 주로 먹었을 남편에게 집에 온 편안함을 주는 것은 종일 켜 놓는 텔레비전과 내가 차려준 밥 정도가 아닐까?

어제 남편이 벗어 놓은 구두를 보니 꽤 낡았다. 오늘은 특별한 선물로 구두 한 켤레를 사야겠다. 아마도 내가 현 구두를 버리기 전에는 신발장에 고이 모셔두고 신지 않겠지만. 그래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표현해 주고 싶다.

남편은 나를 위해 청소를 하고 일주일 치 커피를 준비한다. 우리 부부는 서로 말이 없다. 하니 재미도 없다. 같이 살아감에 큰 불만도 없다. 이쯤 하면 되지 않았나. 세상 다른 부부들과 비교하면 불평과 불만이 쌓여갈지도 모르겠다. 다행인 건 둘 다 남의 삶에 크게 관심이 없다.

사랑하지 않지만 존경하는 남편의 주말이 잘 먹고, 잘 쉬는 진짜 휴식이 되길 바라면서 점심 메뉴를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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