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에피소드는 제가 살고 있는 프랑스 남부의 한 시골마을에서 2019년 8월 12일에 일어났던 일을 '한국교육과 프랑스 교육에 대한 한 조각의 단편적인 생각'이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기록한 포스팅입니다.
프랑스인의 개성은 치즈의 수만큼 다양하다
-드골-
몇 개의 치즈가 프랑스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그만치 1200개 종류의 치즈가 프랑스에 있다. 프랑스인의 개성은 치즈의 수만큼 다양하다는 것은 그 정도로 프랑스라는 나라는 다양성을 품고 있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반면에 40년동안 한국에 살면서 내가 느꼈던 바는 ‘다름’을 ‘틀림’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한국이었다. 어른이나 상사가 말하는 것에는 틀린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틀리다고 말하면 안되었던 문화였다. 적어도 내가 3년 전 2016년에 떠날 때까지 내가 느끼는 한국은 그랬었다.
너의 말이 옳고 그름을 먼저 따지기 보다는 버릇없이 대든다며 나이도 어린 것이... 어른이 말할 때 끼어들지 마라며.. 게다가...그것도 여자 주제에 뭘 아냐며.. 말이다. 그래서 회의 시간에도 정말 바보 같은 상사들의 말들이 오고 가면서 시간낭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을 듣고 있으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고, 그 의견에 대해 뭔가 좋은 제안을 하거나 반박을 하며 솔직한 의견을 낼 수 있는 문화가 아니었다. 여자 주제에 뭘 아냐는 이런 말을 당연하게 하는 한국 문화 사회에 염증이 났었고.. 또 그런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분노가 치밀었다.
군대 문화에서 유래된 건지..유교 사회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꼰대 문화에서 유래된 건지..아니면 이 모두가 복합적으로 섞여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기 프랑스에서는 한국의 문화와는 전혀 다르게 서로의 생각에 대해 적극적으로 물어보며 너의 생각은 어떠냐며 아예 공개적으로 말할 시간을 준다. 나는 이것을 ‘마이크 타임’이라고 혼자 생각하는 데.. 여기 사람들은 서로에게 마이크를 내밀어서 의견을 구하는 시간을 종종 가진다. 한국의 문화에 아직도 젖어 있어서 버릇없을까봐 솔직한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윗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의견 개진을 하지 않으며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자신의 의견이 없다며 바보 취급을 받는 곳이다. 이는 윗사람의 의견을 존중한다기 보다는 본인의 의견을 활발하게 이야기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며 여기에서의 수동적인 태도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들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듣다 보면, 정말 깜짝 놀라는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자식이 부모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며 부모가 틀렸다며 거침없이 의견을 말한다....
정말 나이에 상관없이 10대와 40대가 이야기를 하면서도 어린이들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성숙한 사고의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나 인생 헛살았나? 애네들.. 왜 이렇게 말 잘해? 라는 생각이 들며 어린 사람이 윗사람이 틀렸다고 꼬집어서 확고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있는 나로서는 혼자 홍당무가 되는 당혹감마저 느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아주 가끔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에게 “버릇없는 년”이라는 딱지가 붙는 데 반해서 정 반대인 사고 방식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모든 사사건건에 나의 의견을 표출해야 함에 때로는 피로감마저 느낀다.
어제는 남편과 길을 걷다가 남편이 팔을 양옆으로 왔다갔다 하며 걷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시계처럼 똑딱똑딱..하면서 남편이 걷네.. 생각하며 남편에게 “팔을 시계처럼 하고 걷네, 남편.”이라고 말을 건넸더니 남편이 이해하지 못한다. “응 ? 뭐라고?” 라며 묻길래 나는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그랬더니..남편 말이.. “시계”가 아니라..“시계추”라고 해야지..
그 말을 듣고 보니.. “아, 그렇구나.. 그 말이 맞구나.. ‘시계추’ 같다고 이럴 때는 표현해야 되겠구나.. 시계는 정확한 단어의 표현이 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의 생각의 꼬리는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나의 단어의 부정확한 선택은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똑딱..시계는 아침부터 똑딱똑딱.. 언제나 같은 소리 똑딱똑딱.. 부지런히 일해요.. “ 이라는 어렸을 적에 배웠던 동요가 있었다. 나의 부정확한 단어 선택은 그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러면서 내가 배웠던 한국의 교육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생각해 보게 된다. 다음은 한국에서 내가 받았던 교육의 단면이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능동적으로 생각해보기도 전에, 나는 중학교 다닐 때는 내가 태어난 의미를 아침마다 암기를 했다.
박정희가 만든 ‘국민교육헌장’을 나는 중학교 때 암기를 했어야 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이다.”
라며.. 암기할 당시에는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모른 채 단지 암기하지 않으면 담임에게 야단맞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기계적으로 암기했을 뿐이었다. 이는 나에게 마치 초등학교 시절의 구구단 암기하던 것의 연장선상이었으며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으니 암기했던 영어 불규칙 동사 암기와 비슷했다.
아직도 박정희가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하게 했던 것에는 개인적으로 반감이 많이 든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나의 의지로 능동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땅에 던져진 것이라는 알베르 까뮈의 생각을 나는 더 지지하며, 내가 평생을 살면서 자주독립의 자세를 어떻게 확립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게다가 외부적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를 하기에 나의 그릇은 턱없이 작다.
이런 나의 비뚤어진 생각은 한국에서 살기에 부적응자.. 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며.. 한국의 문화를 어렸을 적부터 습득했던 나는 아직도 머리 구석구석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자신의 의견을 확고하게 말하기 보다는 우유부단함의 약간은 소극적인 사람이겠지. 그래도 한국보다 프랑스가 더 나은 이유는 여기 프랑스에는 하도 극단주의자들이 많으니 나 정도의 다름은 다름의 취급도 받지 않는 사회라는 것. 그런 다양성의 사회이기에 비로서 나의 다름은 단지 먼지의 티끌만큼의 정도로 눈에 띄지 않고 사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