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달려드는 모든 바이러스

by 마담 리에

2018년 12월 04일, 항암치료 2차


두 번째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이번 유방암과 관련한 수술, 치료를 위해서 모두 엠뷸런스로 왕복을 할 수 있었다. 모두 남편이 가입한 직장 보험(mutuelle)의 혜택 덕분이었다. 우리집에서 몽펠리에에 위치한 병원까지 한번 왕복하는 데 엠뷸런스로 300유로 정도가 드는 데 이 모든 혜택을 고스란히 받을 수가 있다는 점에 있어서 고맙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비록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고 얼굴 표정의 변화와 몸짓에서 추측을 할 뿐이었기에 겁이 났지만 이 많은 검사와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상충하는 양가감정이었다.


아침 9시 45분에 엠뷸런스가 집 앞에 도착했다. 오늘은 까롤이라는 여자가 운전을 해주었다. 내가 사는 곳이 시골 마을인데다가 13년째 이 동네에서 살고 있는 남편은 앰뷸런스 운전 기사들과 모두 알고 있는 사이여서 병원에 도착하는 1시간 30분 가량 둘의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첫 번째 항암치료 이후 증상에 대해 종양학 의사와 이야기 한 후에 두 번째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빨간색의 약물이 몸안에 투입이 되기 시작하자 몸에 힘이 빠져 나가기 시작하면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잠이 몰려 왔다. 피곤해서 돌아버리겠는데 잠을 잘 수도 없게 내 앞에 피부관리사가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 직업이겠지만 프랑스어로 설명하는 그 피부관리사 때문에 잠이 들지도 못하고 그 설명을 들어야 했다. 알아 듣지 못하는 것을 계속 듣는 것은 고문이었다.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통역을 해 줄 수 있는 남편은 밖에 나가서 통화중이었다.


그 피부관리사의 설명에서 대충 내가 이해한 바로는 앞으로 피부가 극건성이 되므로 반드시 장갑을 끼고 크림을 바를 것이며, 어떤 크림이 좋은지 추천해 주었다. 그리고 눈썹이 모두 빠질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비해서 어떻게 눈썹을 그리는지 알려 주었다. 신체 멀쩡한 상황에서 들었어도 나의 낮은 프랑스어 실력으로 이해하기 힘든 설명이었지만 쏟아지는 잠을 물리치며 들어야 하는 피부관리사의 설명은 고문이었다.




2018년 12월 06일, 나에게로 달려드는 모든 바이러스


이틀 전에 두 번째 항암치료를 받고 어제 하루 종일 쉬면서 그 에너지를 모아서 오늘은 프랑스어를 배우러 갔다. 남편은 오늘 학교 가지 마라며 아침부터 얼굴에 화가 나서 씰룩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그냥 무시했다.


프랑스어를 배우러 가기 위한 것을 내가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수업을 받으러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편은 물론 나의 건강 상태가 걱정이 되어서 화를 내는 거겠지만, 한국말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고 영어도 통하지 않는 이 동네에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를 모두 잃어버린 나머지 그 스트레스가 나를 암에 걸리게 할 정도로 힘들게 해서 죽기 전에 내 생각을 프랑스어로 말이라도 해야겠다며 2년 넘게 투쟁해서 겨우 잡은 기회인데 수업에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오늘 한번 쉬게 되면 다음에 또 쉬게 될 것이다. 한번은 어렵지만 그 뒤로 두세번 반복은 쉽고 그 뒤로는 습관이 되버리는 것이 사람 습성이다. 여기에서 아프다고 내가 한발짝 물러서면 나는 평생 반벙어리로 타국에서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나는 개미지옥에 떨어지느니 차라리 신체적으로 아파도 가는 것을 택했다.


목도리로 세 겹을 칭칭 둘러싸고 따뜻한 패딩을 입고 모자를 쓴 채 눈만 내놓고 버스정류장을 향해서 30분간 걸어갔다. 항암치료 후 면역력이 엄청나게 떨어진다는 것을 실감한 날이었다. 프랑스어 수업을 같이 듣는 내 옆에 앉은 여자에게서 약간 안씻은 냄새가 났는데 바로 감기에 걸려버렸다. 마치 신생아의 면역력처럼 길거리의 모든 바이러스가 나에게 달려드는 것 같았다.


저녁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었던 호궁치 수치를 높여주는 백만원 가량하는 후덜덜한 가격의 Newlasta 주사를 배에 놓아 달라고 했다. 그 주사를 맞고 나니 약간 괜찮아 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밥은 먹는둥 마는둥 했고 토할 것 같아서 약도 복용하고 더 이상 버텨낼 에너지가 없이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2018년 12월 07일, 종양유전학(Oncogénétique) 검사


병원에서 9시 30분에 Oncogénétique (종양유전학) 검사가 있다고 했다.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 onco » 는 "암(cancer)"을 의미하며, « génétique » 는 유전 (및 유전자)과 관련된 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프랑스어를 배우러 가야 하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검사가 우선이기 때문에 병원에 갔다. 그리고 결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Certificat de présence 서류를 병원에 요청해서 받아서 프랑스어 배우는 곳에 제출했다. 프랑스 시스템 상 결석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pièce justificative (증명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막상 병원에 도착하니 Oncogénétique (종양유전학) 검사를 하는 것이 아니었고 La consultation d'oncogénétique이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검사가 아니라 상담이었던 것이었다. La consultation d'oncogénétique(종양유전학 상담)이란 상담을 통해 암에 대한 가족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맞춤형 선별검사 및 모니터링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 상담사는 나에게 유전자 검사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나서 가족이나 친척 중에 암에 걸려서 죽은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당연히 프랑스어로 설명을 해 주었다. 상담사가 길게 무언가를 설명 했는데 남편은 한마디로 나에게 영어로 통역을 해 주었다. 그러다가 남편은 이제 통역해주는 것도 지겨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만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그 상담사의 설명을 나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상담을 마쳤다.


게다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 상담이 끝날 무렵 그녀는 Oncogénétique (종양유전학) 검사에 가장 중요한 피검사는 현재 병원에서 불가능하고 다른 국립병원에 가서 해야 한다고 했다. 사흘전에 항암치료 받아서 오늘 몸 상태가 좋지도 않아서 움직이기도 힘들지만 검사가 있다고 해서 병원에 왔더니 상담이었고, 정작 피검사는 다른 국립병원으로 이동해서 번호표 뽑고 기다려서 해야 한다니… 비효율적이고 힘든 이 상황을 프랑스어로 말도 못하겠고, 내가 아프다고 나와 함께 동반해 주는 남편이 고마우면서도 본인이 더 스트레스 받고 힘들어하는 모습 보니까 모국어인 한국어로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실 때 엄마는 항상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쓰셨다. 엄마는 아버지가 아프니까 엄마까지 우울해 하면 아버지가 힘들거라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면서 병수발을 했다. 현재 내가 투병 생활을 하면서 지금 돌이켜 봐도 우리 엄마는 정말 강인한 분이었다.


이해 못하는 상담 받고 피만 뽑고 왔을 뿐인데 하루가 지나갔다.




2018년 12월 10일, 프랑스어 배우러 가기

내가 프랑스어를 배우러 가는 곳은 학교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서 직업훈련소 같은 기관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일을 하고 싶지만 프랑스어 수준이 일을 하기에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직업훈련소 같은 기관에서 프랑스어의 수업을 해준다. 그러므로 프랑스어를 빨리 배우고 익혀서 일을 하러 가게 도와주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프랑스인과 결혼하여 배우자 비자를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관에서 프랑스어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직업훈련소는 어학원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어학원은 대학 진학을 하기 위해 프랑스어를 배우려 하는 학생들이 대다수이다. 그런만큼 어학원에서 제공하는 어학 수준은 초보레벨 A1 부터 상위레벨 C1 또는 C2 까지 수업을 제공한다. 반면 적어도 내가 프랑스어 수업을 받았던 이 직업훈련소는 프랑스의 예전 식민 국가였던 곳에서 온 사람들 또는 난민들이 대다수였다. 이미 그들의 나라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했던 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듣고 말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반면 읽고 쓰기가 전혀 되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문법 같은 경우는 1년 내내 기초 수준의 반과거, 복합과거 이상 진행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만큼 그곳에서는 기껏해야 초중급 B1의 수준까지밖에 배울 수 없는 곳이었다.


어쨌든 간에 집에서 50km 떨어져 있는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직업훈련소에 갔다. 내가 살고 있는 시골 깡촌 근처에는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교육의 수준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말을 잘 하는 그들에 비해 나의 프랑스어 수준은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불가능했으므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치료도 힘들고 아프지만 시간은 흐르고 지나는 세월은 붙잡을 수 없다.

이 직업훈련소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야 했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30분정도 걸어가야 했다. 아침에 이 버스를 놓치면 그 다음 버스는 3시간 뒤에 있으므로 수업을 듣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이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이 버스는 종점까지 있는 마을의 골목길을 돌며 모든 승객들을 데리고 갔다.


내가 살고 있는 옆 마을에 사는 친구 A는 나와 같은 버스를 탔다. 1년만에 만나는 그녀는 굉장히 반가웠다. A는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나서 청소년 시절에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일을 하고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영국에서 살 때 A는 어느날 세탁방에 빨래를 돌리러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빨래 돌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한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고 A는 결혼을 해서 남편의 건강상의 이유로 햇살이 따사로운 프랑스 남부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 1년만에 만나는 친구 A와 나는 신나게 수다를 떨면서 같은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어느 누구나 본인의 삶에 굴곡이 있지 않은 사람이 없겠는가 ? 그러나 친구 A의 삶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친구 A는 영국인 남편과 함께 프랑스 남부에 정착을 하기 위해 임산부였던 몸으로 캠핑카로 영국에서 프랑스로 왔다. 그녀는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만삭인 몸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 도착한지 1주일만에 프랑스 남부에 있는 Carcassonne(까르까손) 마을에 있는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다. 어떻게 캠핑카를 타고 올 생각을 했으며 샤워는 어디에서 했냐고 했더니 시청에 부탁해서 해결하기도 했다고 했다. 생활력 하나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친구였다. 150cm 정도되는 그 자그마한 체구에서 어쩜 그렇게 강인한 깡다구가 있는지 놀라웠다. 친구 A는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프랑스에 거주한지 2년이 넘어도 아이를 돌보느라 좀처럼 집에서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게다가 그녀는 간질 증상이 있어서 아침 저녁으로 약을 복용해야 했는데 La carte Vitale (의료보험 카드)를 여전히 받지 못해서 벌써 2년 동안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고 기다리면서 carte Vitale (의료보험 카드)를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친구 A는 2년동안 아이 돌보느라 시간이 부족하여 프랑스어는 전혀 늘지 않아서 초급반으로 배정되었다. 나는 중급반이었기 때문에 그녀와 같이 수업을 들을 수 없었지만 수업이 끝나고 점심을 근처 공원에 가서 같이 먹었다. 오후 수업까지 듣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몸이 피곤해서 만신창이 너덜너덜해졌다.



2018년 12월 12일, 주치의 면담


항암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약간의 기온의 변화나 주변의 더러운 환경에 정말 예민하게 모든 것이 반응한다. 집 밖에 나가면 대기오염을 비롯해 모든 것들이 나의 신체를 공격하는 듯하다.


오늘은 17시15분 주치의와 항데부가 있었지만 나의 주치의는 오늘 휴가중이라서 같은 진찰실에서 일하는 E 의사가 나를 진찰하기로 했다. 너는 아프니 ? 나도 아프다. 같은 반응으로 차갑고 냉소적인 나의 주치의와는 상반되게 E의사는 인간적이었다. 언제나 시간을 재면서 빠르게 처리하는 주치의에 익숙해져 있다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상담을 해주는 E 의사에게 감동마저 받았다. 프랑스에서 특히 시골에서 일 잘하면서 인간적인 의사 찾기는 매우 드문 일이어서 그런 듯 싶다.


그러나 이번에 처음으로 E의사에게 진찰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도 작년 겨울에 내가 감기 걸렸을 때 병원을 찾았을 때 그때도 주치의가 휴가라서 나는 E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었다. 감기여서인지 역시나 작년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약을 처방받았다. 항생제, 코 스프레이, 돌리프란 이렇게 말이다. 항암치료 이후 피검사를 하니 간에 부담이 많이 간 상태라서 뭔가 다른 약을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여하튼 감기로 고생하다보니 프랑스에 살면서 불편한 점 한 가지가 있다. 마스크를 밖에서 마음대로 쓰고 돌아다니는 한국, 일본에서와는 다르게 여기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외출하면 테러리스트로 오해받을까봐 감기가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쓰지 못하는 것이 엄청나게 불편하다. (참고 : 코로나 이후로는 상황이 바뀌었음을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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