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힘

by 해오기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을 때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읽어보곤 한다. 그럴 땐 소리를 내어 읽어 보지만 그래도 영 성에 차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공부할 때 눈으로만 보는 것보다 쓰면서 하면 더 잘 암기되곤 했다. 좋은 글을 한 번 더 마음에 새기고 싶어 지난봄부터 필사를 시작했다. 적당한 크기의 노트를 준비하고, 인덱스로 표시해 놓은 구절을 천천히 적어 본다.

더 예쁘게 글씨를 쓰기 위해 문구 쇼핑도 나선다. 필기구를 잡았을 때 편히 잡히거나 선명하게 나오는 펜을 고른다. 미끄러지듯 써지는 펜은 오히려 피하는 편이다. 여러 가지를 써 보고 나에게 맞는 펜을 고른다. 고가의 장비가 필요치 않아 다행이다.

문구점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구경할 것이 많아 자주 방문하는 곳이다. 어렸을 땐, 정해진 용돈 내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느라 이걸 살까 저걸 살까 고민하느라 한참의 시간을 보냈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좋아하는 필기구를 고민 없이 맘껏 살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몸만 어른이지 마음은 아직 나약한 어린이어서 죽을 때까지 어른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생각하지만, 이럴 땐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노트를 한 권 다 채우고 펜이 닳도록 쓰고 나면 또 문구 쇼핑을 할 수 있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문구점을 찾는다.

중요도에 따라 글자 크기를 바꾸어서도 쓰고, 펜 종류를 바꿔 가며 가지런히 문장을 옮겨 적는다. 예쁜 스티커로 주변을 꾸미기도 한다. 요즘 다이어리 꾸미기 시장 규모가 아주 크다는데 왜 빠져드는지 알 것 같다. 정성 들여 몇 페이지를 쓰고는 자꾸 들춰본다. 외출을 위해 한껏 예쁘게 꾸미고 셀카를 찍듯,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사진을 찍어 자랑하고 싶어진다.




요즘 유행하는 성격유형 검사에 따르면 나는 E성향이다. E는 외향형 I는 내향형의 사람인데, 나는 검사와 달리 내향형의 사람이다. 외향형은 아니지만 적극적인 성격 탓에 E성향으로 나온 듯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성향을 E와 I로 구분 짓는다는 게 말이 안 되지만 한 번쯤은 해 볼만 한 재미있는 검사다.


검사를 하지 않고도 E와 I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친구와의 약속이 취소됐을 때 아쉬워하는 사람은 E,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은 I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난 E성향이 맞긴 하나보다. 그런데 요즘은 누구를 만나기보다 조용히 있고 싶다. 귀소 본능이 강해졌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책을 읽고 필사가 하고 싶어진다.

필사를 한다고 해서 살림살이가 나아진다거나 건강이 좋아지는 건 아니다. 정성 들여 많은 시간을 쓰고 있으면 손가락과 팔목이 욱신거린다. 필사노트를 예쁘게 꾸미면서 쓰다 보면, 책을 읽고 좋은 문장을 간직하기 위해 필사를 하는 건지 필사를 위해 책을 읽는 건지 모르겠다. 오른손 중지 손가락에 굳은살이 더 두껍게 박이고 있지만, 필사를 할 때면 내 기분이 좋아지니까 자꾸 한다. 이만큼 썼다는 뿌듯함도 한몫한다.




일도 없고 약속도 없을 땐 자주 무기력함에 빠지곤 했다. 널린 집안일은 눈에 보이지 않고, 새로울 것 없는 SNS를 자주 들락거렸다. 자동으로 생성되어 있는 유튜브 영상을 아무 생각 없이 보기도 했다. 코로나로 활동의 제약이 있었을 때 특히 그러했다. 그럴 때 필사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무기력하게 보낸 지난 시간의 내가 조금은 아쉽다.


여러 사람을 만나 시원하게 떠들다 오는 것도 재미난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날 때는 항상 상대방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필사를 할 때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에 알맞은 대꾸를 해 주기 위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나만을 생각하며 글을 옮기고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의욕이 넘친다.


오늘도 나는 필사노트에 멋진 문장을 훔쳐 적는다. 몰래 써 보는 문장들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새로운 글로 탄생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