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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미술사학도 Feb 01. 2020

부석사의 석등

이 세상을 진리로 밝혀주는 등불, 국보 17호

안양루 아래의 어두컴컴한 누하주를 지나서 올라오면 이렇게 불전인 무량수전과 그 앞의 석등이 모습을 드러낸다(사진3). 이 장면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도 그 가파른 산길을 올라간다. 저질체력이라 헉헉대는 사람도 많고 무릎이 불편한지 절뚝거리며 걷는 어르신들도 많다. 


일주문부터 천천히 보면서 올라왔다면 이런 비극은 덜했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의 문화재 감상 수준이 아직 이 정도 밖에 안되는 모양이다. 아니면 평소 몸에 밴 빨리빨리 정신을 추구하는 것일지도.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선진국이 되려면 멀었다는 느낌은 지울 길이 없다. 

사진3. 안양루를 올라오면서 찍은 무량수전과 석등의 모습.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고 부석사 이야기를 해보자. 학자들은 부석사의 가람배치가 불교의 교리인 3품3생론을 형상화 시킨 것이라고 보고 있다(사진3-1). 그에 따라 무량수전 영역은 극락세계로 본다.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중생이 죽고나면 저승에 가게 되는데, 거기서 심판을 받게 된다. 망자의 인생은 생전에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상중하의 3가지 품으로 나눈다. 각각의 품에서도 상중하의 3생으로 나뉜다. 그래서 총 9개의 등급으로 인생이 나뉘고 그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 창건주인 의상대사가 무량수전을 찾는 대중들한테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본인의 삶을 한번 돌이켜보시게" 라고 말하는 듯하다.

(사진3-1) 무량수전 각각의 영역은 3품9배론을 구현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자료출처 : 문화유산채널 유튜브)

혹은 화엄경에 나오는 십지품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십지품은 보살수행의 10가지 단계를 의미한다. 잘모르니 그에 대한 설명은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이제 석등을 보자(사진3-2). 어느 사찰에 가더라도 법당 앞에는 석등이 있다. 탑이 있는 경우도 있으나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다. 무량수전도 석등만 있고 탑은 없다. 탑은 붓다의 사리를 모신 곳이다.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는데 아미타불은 다른 말로 무량수불이라고 불리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명의 한이 길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탑을 세우지 않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석등은 탑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야간에 불을 밝히기 위한 실용적인 용도도 있지만 그보다는 불법의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물로 세워졌다. 부처의 진리가 이 세상의 등불이 되어주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 보면 크게 무리가 없다. 불을 밝히기 위한 실용적인 용도라면 지금의 구조는 조금 비효율적이다. 화사석을 보면 8각으로 되어 있는데 화창은 4군데만 뚫려있으니 말이다. 불을 밝히기 위한 목적이라면 화창을 8곳을 뚫었어야 한다. 그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무량수전의 석등을 보면 화창을 제외한 4면의 화사석에 보살상을 조각하였다(사진3-4,3-5). 마치 4분의 보살들이 공양을 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화창 안쪽에서 피어나는 불꽃을 부처와 동일시 여기고 만든 것 같다. 탑을 만들때 부처의 사리가 없으니 그것을 대신할 경전을 봉안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싶다. 화사석이나 화창 등의 용어를 잘 모르는 분들은 사진 3-3을 준비하였으니 참조하시기 바란다.


사진 3-2. 무량수전의 석등. 화창 주위로 4분의 보살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사진3-3. 석등의 구조와 명칭
사진3-4. 화사석에 새겨진 보살들 1


사진 3-5. 화사석에 새겨진 보살들2


화창 주위를 보면 작은 못자국들이 눈에 띈다(사진3-6). 이는 화창에 문을 달았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 이곳 부석사 석등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 사찰의 석등도 이런 비슷한 못자국이 보인다. 문이 있어야 바람이 불어도 불꽃이 꺼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3-6. 화창 주위에 있는 못자국들


석등 앞에 보면 이런 식으로 넓적한 돌이 깔려있다. 위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무엇일까? 흔히 배례석으로 불리우는 돌이다. 석등이나 탑 앞에 많이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곳에서 절을 했던 것일까? 

(사진3-7). 저 연꽃 무늬가 있는 곳에 머리를 대면서 절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 앞에 멍석 같은 것을 깔고 절을 했던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길이 없다.

사진 3-7. 석등 앞 배례석??

불국사의 석등 앞에도 이런 배례석이 있다. 그런데 불국사에 내려오는 문서인 "불국사 고금창기"에는 이 돌을 봉로대라고 하고 있다. 향을 공양하는 돌이라는 의미이다. 봉로대의 연꽃 문양이 있는 곳에 향로를 놓고 향을 피워서 공양을 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부석사의 이 돌도 봉로대가 아닐까? 비슷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고려시대까지는 불전 안에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엄격히 제한되었다고 한다. 부녀자들이나 일반 백성들은 철저하게 출입이 금지되었다. 스님들도 위계가 낮은 스님들은 출입이 제한 되었다고 하니 과거에는 불교가 얼마나 잘 나갔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사례이다. 이렇게 부처를 친견하기 어려우니 먼발치에서나마 향 공양을 올리고 절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봉로대나 배례석이나 둘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명칭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로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과거에 실제로 어떠했는가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상상의 나래를 펴보자.


부석사의 석등을 보면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이 무량수전과 비교해 보았을때 정중앙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왜 그런 것일까? 이는 무량수전 내부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니, 바깥에 있는 석등하고 무량수전의 안쪽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 지금으로선 이해가 안가겠지만 나중에 무량수전 내부를 살펴보면 알게 된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무량수전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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