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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미술사학도 Feb 16. 2020

부석사 무량수전

과연 소문만큼 대단한 건축인지 알아보자

부석사의 꽃이라는 무량수전을 이야기할 차례가 왔다. 앞서 여러번 언급했지만 부석사를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 무량수전을 제외한 다른 전각이나 석조 문화재들을 유심히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보았다면 미술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틀림없으니 조용히 다가가서 설명을 부탁드리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무지한 사람들이라도 무량수전은 유심히 본다. 무량수전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미술사학자 故 최순우 선생의 저서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한 TV프로에 소개되며 널리 이름을 알렸다. 이 외에도 유튜브나 블로그 등에서 부석사를 소개한 콘텐츠들을 보면 무량수전을 가장 큰 비중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나는 무량수전을 처음 봤을때 그만한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너도나도 극찬을 하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솔직히 의심도 든다. 그 사람들이 진짜로 안목이 있어서 극찬을 하는 것인지, 유명한 학자들이 극찬을 하니 마땅히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것인지 말이다. 나는 무량수전보다는 오히려 범종루에 더 마음이 끌린다. 일반적인 건축물과 다른 독특한 외관과 좌향을 보면서 왜 저렇게 했을까 하는 호기심이 든다.


그래도 무량수전까지 올라와서 감동을 받은 부분이 하나 있다면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산줄기의 풍광일 것이다. 정말이지 이곳이 신선의 세계 혹은 극락 세계인지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구름이 없고 미세먼지가 없는 시기를 잘 맞춰서 온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곳에 사찰을 세울 생각을 한 의상대사의 안목이 대단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안양루에 올라가서 본다면 나무가 시야를 가리지 않아서 더 좋을텐데 그점은 약간 아쉽긴 하지만.(사진 4-1, 4-2, 4-3 참조)

사진 4-1. 눈 내린 겨울의 무량수전 모습. 이른 아침이라 아무도 없다. 국보 제 18호.
사진 4-2. 안양루 누각 기둥 사이로 보이는 소백산 줄기. 누각 위로 올라가서 볼 수 있다면 더 좋을텐데.
사진 4-3. 안양루 옆에서 바라보는 풍경. 나무들이 시야를 일부 가리는게 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량수전은 건축사적으로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바로 몇 안되는 고려시대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무량수전을 전면적으로 해체, 수리 공사를 한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 우왕 2년인 1376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발견됨에 따라 고려시대 건축물로 인정을 받게 된다. 남북한을 통틀어 고려시대 건축물은 몇개 없다. 열거해보자면 다음과 같다.(사진 4-4참조)


-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조사당

- 봉정사 극락전

- 수덕사 대웅전

- 강릉 객사문

- 성불사 응진전(북한 황해도 사리원시)

- 심원사 보광전(북한 평안북도 박천군)


사진 4-4 왼쪽부터 성불사 응진전, 심원사 보광전, 봉정사 극락전
사진 4-4 (좌)수덕사 대웅전, (우)강릉 객사문



목조건축물의 특성상 화재에 취약하다. 특히나 외침이 많았던 우리나라는 현존하는 목조 건축물이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문에 조선 전기의 건축물도 드문편이다. 이런 상황이니 고려시대 건축물은 얼마나 귀중한 가치를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의 건축물은 주심포 양식이라고 알려져 있다. 주심포는 기둥 머리 위에 공포를 한개만 올리는 방식의 건축을 의미한다(공포는 지붕의 하중을 기둥으로 전달해 주는 구조물). 기둥 머리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도 공포를 올리는 수법은 다포 양식이라고 한다.(사진 4-5, 4-5-1 참조) 무량수전은 이중에서 주심포 양식을 하고 있는게 특징이다. 다포 양식은 고려 후기에 들어와서 조선조에 일반화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고려 건축물은 다포 양식에 해당한다.

사진 4-5. 무량수전의 공포. 기둥 위에 이렇게 한개의 공포만 올라와 있으면 주심포 양식이다.


사진 4-5-1. 이렇게 빈틈없이 공포가 꽉 차있으면 다포 양식이다.(대구 동화사 대웅전)


그리고 일반적으로 목조 건축물의 중수는 지은지 100~150년이 지나면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무량수전도 13세기 무렵의 건축물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되곤 한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서 학자들간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1358년에 왜구들이 쳐들어와서 부석사가 큰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 무량수전이 일부 피해를 입었던 것을 중수(손상입은 부분을 보수)한 것인지, 아니면 홀랑 타버려서 중창(새롭게 다시 지음)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중수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부석사 조사당보다 앞선 양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사진 4-6 참조). 참고로 조사당은 1377년에 중수 되었다는 기록이 발견 되었다.

사진 4-6. 부석사 조사당. 1377년에 중수되었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다.


주심포 양식 외에도 무량수전의 또 다른 특징이 몇가지 있는데, 배흘림 기둥을 사용했다는 것과 활주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 현판의 생김새가 독특하다는 점, 양옆으로 폭이 넓다는 점 등이다.


먼저 배흘림 기둥에 관하여 논해보자. 배흘림 기둥은 흔히 시각적인 착시 현상을 교정하기 위한 장치로 알려져있다. 서양에서는 이를 엔타시스라고 부른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이 이를 사용한 대표적인 사례이다(사진 4-7). 기둥을 보고 있으면 가운데가 좁아 보이는 현상이 발생하여 보는 사람이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가운데 부분을 약간 불룩하게 만들어서 그런 착시 현상을 교정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사진 4-7. 파르테논 신전의 엔타시스,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


흔히 그렇게 알고들 있고 나 조차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현 스님의 책 '사찰의 상징세계'를 읽고 나서 그러한 믿음이 근거가 부족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가운데 부분이 오목해 보이는 착시현상은 기둥 사이가 비어 있어야 발생한다고. 무량수전 같은 경우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문이 달려 있으니 궂이 배흘림 기둥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당시 사람들의 미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게 좀 더 합리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다.


다음으로 활주라는 것은 처마 부분을 받쳐주는 보조 기둥을 의미한다. 무량수전의 지붕이 커서 배흘림 기둥 만으로는 감당이 안되니 보조 기둥인 활주를 사용한 것이다. (사진 4-8)

사진 4-8. 처마를 받치고 있는 활주의 모습.


다음으로 무량수전의 현판을 보면 가로로 긴 형태가 아니고 네모 형태를 띄고 있다. 왜 이렇게 했는지는 나도 의문이다. 이 글씨는 공민왕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사진 4-9)


공민왕 재위 시기는 몽골족의 원나라가 쇠퇴하고 한족들이 세운 명나라가 흥기하는 그런 시기였다. 국제정세가 빠르게 변하는 그런 긴박한 시기였는데, 그 와중에 한족의 도적떼인 홍건적이 고려로 쳐들어오는 일이 발생한다. 당시 내부적으로 많이 곪아있던 고려로써는 이를 쉽사리 격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임금이 수도를 버리고 안동까지 피난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홍건적이 진압되고 다시 안동에서 개경으로 돌아갈때 이곳 부석사에 들러서 써준 것이 이 현판이다. 임금이 안동까지 도망갈 지경이었으니 백성들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을지 짐작조차 안된다.

사진 4-9. 무량수전 현판. 공민왕이 써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양 옆으로 폭이 넓다는게 무량수전의 특징이다. 전면 5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지형의 특성상 그런게 아닐까 싶다. 석단을 쌓아서 만든 터이니 만큼 넉넉한 공간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공간에 안양루도 있어야 하고, 석등도 있어야 한다. 다행히 옆으로는 여유 공간이 있어서 가로로 긴 모습의 건축물이 만들어졌다. 내부에 들어가서 보면 그렇게 확보한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볼 수 있는데, 다음 글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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